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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묵조사와 김제 망해사 팽나무 - 2013년 07월 18일 -
아트코리아 | 조회 416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묵조사와 김제 망해사 팽나무
400년 전 서해바다 보이는 곳에 심어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망해사(望海寺)는 전국에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이고, 다른 한 곳은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이다.

전자는 671년(문무왕 11년) 부설거사라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서, 후자는 헌강왕(재위 875~886년) 대 왕명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우선 김제의 망해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곳에 있는 조선 중기 학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진묵조사(震默祖師)가 심은 팽나무(전북 기념물 제114호)를 보기 위해서였다.

대구에서 김제는 길도 멀지만 바로 가는 교통편도 없다. 전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88고속도로를 달리니 차창으로 전개되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모 인사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할 때 도와준 셰르파를 초청했었는데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의 산을 두고 왜 먼 그곳을 찾는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지만 7월의 우리 산하는 너무나 싱그럽다.

눈이 시리게 푸른 산과 들, 그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정갈하게 가꾼 논밭을 보니 마음이 한결 순수해진다. 이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일까?

다시 김제행 버스로 바꾸어 타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도를 꺼내 들고 행선지를 찾고 있던 나에게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망해사를 보고 당일로 대구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막차가 오후 5시 40분이라 걱정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택시를 이용하라며 친절하게도 전화를 걸어 흥정까지 해 주었다.

스님은 법명이 일옥(一玉), 법호는 진묵(震默)으로 1562년(명종 17년) 만경현 불거촌(佛居村`현 김제시 만경읍 대진리)에서 태어났다. 7세 되던 해 전주의 서방산 봉서사(鳳棲寺)에 출가했다고 한다. 불경을 읽는데 한 번 눈에 스치면 외워 아무도 그를 가르칠 수 없었다고 한다. 언젠가 주지가 어린 그에게 신장단(神將壇)에 향불을 올리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얼마 후 주지의 꿈에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인데 부처님이 오히려 우리를 위해 향을 올려 불안하다. 어서 그만두도록 해 달라’고 하여 즉시 중지시키고 그때부터 스님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고 한다.

생시에 많은 이적(異蹟)을 행했다.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김장생의 제자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1573~1661)과 절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봉곡이 ‘주자강목’(朱子綱目)을 빌려주고 하인을 딸려 보냈다. 스님은 책을 바랑에 넣고 길을 걸으며 한 권씩 꺼내 대강대강 훑어본 뒤 한 권 한 권 땅에 떨어뜨리고 발문만을 가지고 절로 돌아갔다.

뒷날 봉곡이 스님에게 물었다. ‘책을 빌려가서 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하였더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득어망전(得魚忘筌), 즉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이지요’ 하였다.

봉곡이 강목을 꺼내 진묵에게 그 내용을 물으니 한 글자도 틀림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앙산(維仰山`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길지에 장사를 지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제사를 올리고 풀을 깎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의 농사는 풍년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1633년(인조 11년) 열반하니 세수 72세, 법랍 52세였다. 부음을 접한 봉곡 선생이 ‘비록 승려라고 하지만 사실은 선비이다.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어록은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가 지었다.

망해사 팽나무는 2그루로 1589년(선조 22년) 낙서전(樂西殿`전북 문화재자료 제128호)을 준공하고 심은 것이라고 하니 400여 년 전이다. 각각 21m, 17m이다. 당호 낙서(樂西)는 서해바다를 보는 즐거움이 있는 집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스님이 즐겨보았던 앞바다는 지금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내해(內海)가 되었다.

일몰이 아름답다고 하나 날씨조차 흐리고 또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 2013년 07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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