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성인 온계 이해 선생과 안동 온혜리 밤나무
이정웅 | 조회 458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성인 온계 이해 선생과 안동 온혜리 밤나무
지네 닮은 마을 앞산의 독기를 누르려고 심어

나무는 재배한 지가 오래된 나무임에도 노거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에 있는 것이 수령 600년으로 높이가 14m, 지름이 203㎝가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자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498호)로 지정된 나무이다.

밤나무가 오랜 유실수라는 것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원효불기’(元曉不羈) 조에 의하면 ‘스님의 아버지 담내(삼국사기에는 담날)는 압량군(지금의 경산시) 남쪽 불지촌 사람이었다. 만삭이 된 아내가 어느 골짜기를 지나가다가 밤나무 아래서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이 가던 담내가 옷을 나무에 걸고 산모를 돌보아 태어난 아이가 원효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 열매 또한 보통 것과 달라 사라율(娑羅栗)이라고 불렀다.

어느 절의 주지가 종자(從者)에게 하루 끼니로 밤 두 알을 주자 그 종자는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다. 관리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밤알 하나가 밥그릇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고 한다.

영남 일대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질 만큼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안동 도산 온혜로 향했다. 수고 12m, 지름 175㎝로 비록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평창의 밤나무에 비해 크기나 굵기가 뒤지나 조선 중기의 문신 정민공 이해(李瀣) 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500년의 밤나무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꽃이 필 이때를 기다려 찾은 것이다.

공은 1496년(연산군 2년)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온계(溫溪)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1528년(중종 23년) 문과에 급제했다.

사간`정언 등 요직을 거쳐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내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이었던 이기를 우의정에 발탁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명종 2년)에 황해도 관찰사, 1549년(명종 4년)에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550년(명종 5년)에는 한성 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소윤과 대윤의 문제를 비판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했으며, 김안로가 인근에 살아 그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그마저 거절했다.

그러나 명종이 공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곤장 100대에 갑산으로 귀양 보내는 것에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니 향년 55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금부의 심문관이었던 윤원형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화를 입었다고 했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 안동의 청계 서원에 배향되었으나 뒤에 훼철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저서로 ‘온계집’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공과 아우 퇴계가 태어난 노송정으로 향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방문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유원지는 만원일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퇴계태실(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을 둘러보고 새로 복원한 온계 종택으로 향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공이 심은 밤나무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큰 밤나무가 들 복판에 서 있다.

종택은 1516년(중종 11년), 공이 분가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밤나무도 이때 심은 것으로 보인다. 공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퇴계가 어머니를 모시고 5년간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2대손 지암 이인화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이에 반발하여 선성의진 제3대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종택을 의병소로 쓰자 관군이 방화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1년 복원했다고 한다. 공이 많은 나무 중에서 특별히 밤나무를 심은 것은 마을 앞산이 지네를 닮아 상극인 밤나무로 독기를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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