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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400년 만에 환국한 울산의 오색팔중산춘 - 2013년 05월 16일 -
아트코리아 | 조회 515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400년 만에 환국한 울산의 오색팔중산춘
다섯 색깔 꽃, 여덟 겹 꽃잎…임란 때 뺏겼다 되찾아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조선의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포로로 끌고 간 것은 물론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희귀한 나무까지도 가져갔다. 노성환의 ‘일본에 남은 임진왜란’에 의하면 그들이 가져간 나무 중에는 현재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도 있다.

교활한 그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조선의 희귀한 나무를 채집해갔다. 교토 지장원(地藏院)의 명물 오색팔중산춘(五色八重散椿) 즉 ‘울산동백나무’와 나고야성의 ‘조선소철’은 가토 기요마사가, 가가와현(香川縣) 다카마츠시(高松市) 법천사의 ‘소철’은 이코마 치카마사와 가즈마사 부자(父子)가, 센다이(仙台)의 ‘조선매화’는 다테 마사무네가, 오이타현(大分縣) 다케다시(竹田市) 조호쿠쵸(城北町) 영웅사(英雄寺)의 ‘조선 목단’은 나가가와 히데나라가, 야나가와 혼고가와(本鄕川)의 춘양목은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가나자와 견로쿠인 교쿠센인(玉泉園)의 ‘조선오엽송’은 포로로 끌려간 김여철(광산 김씨)이 고향을 잊지 못해 누군가 일본에 가져간 것을 구입해서 심은 것들이라고 했다.

억울하게 납치되어간 그들이 일본의 명물이 되는 역설적인 현실이 한편은 서글프고 한편은 반갑기도 하다. 특히 나고야성 광택사(廣澤寺)의 소철은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법천사의 소철은 다카마츠시의 명목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유일하게 귀국한 나무가 울산동백(오색팔중산춘)이다. 오색팔중산춘이라는 긴 이름은 여느 동백나무와 달리 다섯 색깔로 꽃이 피고, 꽃잎이 여덟 겹이며, 통꽃이 그대로 떨어지는 것과 달리 꽃잎이 하나하나 흩어져 떨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늦은 4월 울산으로 향했다. 혹시 꽃이 지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볼만했다. 울산시청의 화단에는 안내판과 CCTV를 설치해 놓아 보호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울산이 원산지로 임진왜란 때 울산을 점령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으로 가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져 교토 지장원에서 키워진 3세로 1992년 5월 27일 일본 교토 지장원에서 환국하여 심어졌음’이라고 식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나무를 둘러보고 울산시청 당직실을 찾았더니 모두 친절했다. 관광안내책자를 얻어 서생포왜성으로 향했다.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했다는 성이라 규모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작고 허물어져 있었고 남문 쪽의 성벽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는 바다와 접했을 것이나 간척사업 때문인지 지금은 뱃길이 끊겼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시청 여직원이 참고하라며 챙겨준 건축주택과 서상호 사무관이 쓴 자료를 보았더니 울산동백을 가져간 곳이 서생포왜성이 아니라 울산왜성, 즉 학성공원이었다.

자료에는 삼중 스님이 주관하여 수고 0.4m 정도의 3그루를 가져와 독립기념관과 사천조명군총에 각기 1그루씩 심었으나 울산시청에 심은 것만 살아남아 현재 2.5m로 자랐다고 한다. 서 사무관은 울산에서만 살아남은 이유를 ‘조상들이 살던 땅이라는 귀향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90여 그루를 증식 중이라고도 했다.

서생포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쉽게 올 수 없는 곳인 만큼 이참에 잘 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성공원은 태화강 바로 옆에 있었다. 가파르고 숲이 울창했다.

정상에 오르니 울산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1597년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13일간 조선군 1만1천500명과 명나라군 3만6천 명의 연합군이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6만 명과 치렀던 울산전투의 현장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왜적들은 추위와 식량과 식수난으로 전투용 말을 잡아먹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종이와 흙을 끓여 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울산동백의 원산지라고 하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소철, 매화 등 다른 나무들의 2세나 3세도 돌아왔으면 하나 그렇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 한을 품으며 살고 있는 그들을 위로라도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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