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문창후 최치원과 하동군 푸조나무
아트코리아 | 조회 407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문창후 최치원과 하동군 푸조나무
선생이 꽂은 지팡이, 국내서 가장 큰 푸조나무로 성장

 


최치원(崔致遠`857~? ) 선생은 많은 저술과 시문을 남겨 유학자나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또 숲의 효능도 일찍이 알았던 분이었던 것 같다. 그 흔적이 1천 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함양군 상림(上林`천연기념물 제154호)이 그것이다. 태수로 재직할 때 둑을 쌓아 물줄기를 돌리고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성한 호안림(護岸林)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해방비림이자 120여 종 2만여 그루가 자라는 자연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방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 등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 민선이든 관선이든 시민을 보살피기 위한 공직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위한 방법인지를 가르쳐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공은 경주 출신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唐)나라로 유학 갔다. ‘10년 내에 과거에 급제하지 아니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 견일(肩逸)의 간곡한 당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賓貢科`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하는 과거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특히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켜 당나라를 위태롭게 할 때에 절도사 고변의 종사관이 된 공은 황소를 나무라는 글, 즉 ‘격(檄)황소서’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격문이 명문장으로 알려지면서 당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885년(헌강왕 11년) 20여 년의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나라 일을 보게 되었다. 이때 명저 ‘계원필경’(桂苑筆耕)을 완성하여 왕에게 헌납하고, 진감선사탑비 등 비문도 썼다. 그러나 신분적인 한계와 귀족들의 비협조로 능력을 펼 수 없음을 알고 외직을 자원하여 부성(서산), 천령군(함양) 등 지방수령으로 나아갔다.

이때에 사벌주(상주)에서 원종과 애도가 난을 일으키고, 북원(원주)에서 양길과 궁예가 동해안의 여러 군현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면서 서라벌을 위협하게 되니 신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진다.

공은 다시 신라를 세워보기 위하여 894년(진성왕 8년) 국정개혁에 관한 ‘시무 10조’를 올리며 아찬으로 복귀하였으나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진성왕에서 효공왕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지켜보며 벼슬을 버리고 경주의 남산과 대구의 마천산, 의성의 고운사, 부산의 해운대, 경남 하동의 쌍계사, 전북 옥구 등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울분을 달래다가 가야산 홍류동에서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후 인품과 학문이 높게 평가되면서 1020년(현종 11년)에는 내사령(內史令`종1품)이라는 벼슬이 주어지고, 문묘에 모셔졌으며 3년 후에는 문창후(文昌侯)라는 작위(爵位)도 주어졌다. 조선조에 와서는 전국의 모든 향교와 경주의 서악, 태인의 무성, 함양의 백원서원 등에 모셔졌다.

공은 상림 이외에 가야산 학사대에 전나무(경남기념물 제215호)와 하동군 화개면에 푸조나무(경남기념물 제123호)를 심었다고 전해오는데 모두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 한다.

가야산의 전나무와 함양의 상림은 몇 번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하동의 푸조나무는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오류문학회 정시식 회장과 함께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후 대구시청문학회에서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로 문학기행을 갈 때 동참할 수 있어 푸조나무뿐만 아니라, 쌍계사에 있는 고운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도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푸조나무는 모양과 질감이 느티나무와 비슷하다. 그러나 내한성이 약해 전라도나 경상도의 바닷가, 내륙에서는 담양이나 밀양 등 비교적 따뜻한 곳에 자라는 나무다. 씨를 따서 파종을 했더니 대구에서도 발아가 잘 되었다.

하동 푸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며 수령이 500여 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운이 심었다면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일 것이다. 건너편 개울에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소리를 들은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巖)이 있었으나 건널 수 없어 확인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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