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문화인 귀만와 류이주와 구례 운조루 회양목
아트코리아 | 조회 436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문화인 귀만와 류이주와 구례 운조루 회양목

해마다 짧게 가지치기, 크고 굵은 게 특징

 


부자로 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던 인물 류이주(1726~1797) 선생이 살았던 운조루(雲鳥樓`중요민속문화재 제8호)를 최근에야 방문할 수 있었다. 명성을 익히 들어서 오랫동안 별러 왔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섬진강 양안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어느 날 운조루를 찾았다. 우선 큰 규모에 놀랐다. 또한 영남지방의 반가와 달리 연못을 집 밖에 축조해 놓은 것도 특이했다.

특히 끼니를 때우기 곤란한 사람은 누구나 퍼 가도 좋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써 두었던 쌀독부터 찾았다. 과연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간다는 큰 쌀통이 놓여 있었다. 주인의 이러한 이웃에 대한 배려로 동학농민전쟁과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사회가 혼란했던 시기, 즉 가진 자들이 피해를 입을 때에도 운조루는 온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은 문화 류씨 곤산군파 30대 류영삼(柳榮三)과 영천 최씨 사이에서 대구 동구 입석동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호는 귀만(歸晩), 또는 귀만와(歸晩窩)였다. 어려서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사냥을 즐기는 등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개를 갖고 있었다.

17세에 서울로 올라가서, 1753년(영조 29년)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1755년(영조 31년) 총융사 홍봉한(洪鳳漢)이 공이 문경새재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 보낸 일을 상세히 보고하자 영조가 공을 불러 당시 상황을 말하게 하고, 병서를 읽게 한 후에 등용하였다.

1767년(영조 43년)에 공은 수어청 파총(종4품의 무관직)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 1773년(영조 49년)에는 낙안의 세선(稅船`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배)이 부서져 조세가 제때에 올라오지 못하자 영조는 당시 낙안군수였던 공을 세미(稅米`조세로 나라에 바치던 쌀) 이외에 다른 물품들을 함께 실어 배를 파손시킨 죄로 삼수로 유배시켰다.

이듬해 풀려난 공은 가족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갔다가 다시 토지면 오미리로 이주하였다. 공이 이주한 땅은 본래 지역의 토호인 재령 이씨 일가 소유였으며, 돌이 많고 척박하였으나 풍수지리로 볼 때 미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으로 전해 내려왔다. 공은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훗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반 주택으로 평가받는 운조루(雲鳥樓)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776년(정조 1년) 정조가 등극하면서 공은 가선대부 오위장으로 관직에 복귀하고 함흥성을 쌓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상주영장을 거쳐 풍천부사로 전직되었다. 공은 관직 생활 중 대규모 국가 건축공사를 맡아 진행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운조루를 설계하였으며, 공사는 조카인 류덕호(柳德浩)가 맡았다. 운조루는 1776년(정조 1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1782년 공이 용천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긴 공사 끝에 99칸의 대저택이 완성되자 공은 일가친척들을 모아 함께 살도록 하였다. 1790년 재령 이씨와 혼인한 조카 류덕호를 양자로 들여 재령 이씨와 인척관계를 맺게 되면서, 운조루의 집터 또한 완전하게 양여 받게 되었다고 한다.

운조루는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로 천상의 옥녀가 금가락지를 땅에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 형국이어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터에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대구 출신의 공이 낯선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낙안군수로 근무할 때 지나치다가 점지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99칸의 큰 집이었으나 지금은 55칸만 남아 있다.

정원도 잘 가꾸어져 매화와 동백꽃이 활짝 피어 집주인의 고아한 취향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가장 돋보이는 나무는 회양목이었다. 재질이 단단해 주로 도장 만드는 데 쓰이고 조경지와 보도 등을 구획할 때 울타리로 심는 늘 푸른 떨기나무다. 따라서 매년 짧게 전정을 해 그대로 자라도록 놔둔 나무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운조루 회양목은 단목으로 심어져 있을 뿐 아니라, 크고 굵었다. 건축 당시 공이 심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수령이 230여 년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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