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천년 고찰 화엄사 각황전 홍매
아트코리아 | 조회 355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천년 고찰 화엄사 각황전 홍매
계파 성능 스님, 각황전 준공 기념 식수

 


옻골마을에서 한국전통예절을 보급하고 있는 임귀희 원장으로부터 매화 보러 가자는 연락이 와서 동행했다. 임 원장 외에도 금오문화재연구소 김영희 대표, 임경희 사진작가 등 몇 분이 함께했다. 먼저 찾은 곳은 화엄사였다.

한국 불교 천 년의 성지 지리산 화엄사(사적 제505호)는 544년(백제 성왕 22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도량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뒷날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면서 사명이 높아지고, 이어 의상대사가 주석하면서 장륙전(丈六殿)을 짓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을 새겨 화엄도량으로 자리매김된 절이다. 나말 도선국사가 다시 사세를 크게 확장하고 조선조에 와서 선종의 대본산으로 자리 잡았다.

절 주변에는 소나무, 동백나무 등이 울창하지만 절 안에 있는 특기할 만한 나무는 지장암 뒤에 있는 천연기념물(제38호)로, 단 한 그루뿐인 올벚나무와 각황전(국보 67호)의 홍매(紅梅), 그리고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잣나무다. 그러나 일정이 팍팍하기 때문에 다른 나무를 보는 것은 뒤로하고 우선 홍매를 찾았다. 이 홍매는 계파 성능(桂坡 性能) 스님이 심었다고 한다.

스님은 학가산인(학가산은 안동의 진산이기도 하지만 예천도 포함되기 때문에 안동 아니면 예천 출신으로 보임)으로 유람차 남쪽으로 왔다가 화엄사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백암 성총 스님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 수업을 받았다. 백암은 그가 범상치 않는 인물임을 알고 그동안 큰 숙제로 남아 있던 장륙전 중창을 부탁했다.

화엄사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폐허화 된 것을 벽암 각성 대사가 1630년(인조 8년)부터 7년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해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원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지은 장륙전만은 새로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륙전을 새로 짓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을 모르는 바 아닌 그였지만 차마 스승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서원하기를 ‘마치 하찮은 벌레가 산을 짊어진 것처럼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두레박으로 바닷물을 퍼내 구슬을 얻음과 같은 일이지만 뜻이 있으면 어찌 이루지 못할까?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면 하늘이 길을 비춰 주지 않겠는가? 먼저 마음을 다해 기도드려 하늘의 감응을 받은 뒤에 뜻을 이루리라’ 하며 쾌히 승낙했다.

1699년(숙종 25년) 봄 착공하자 많은 신도들이 참여하여 1702년(숙종 28년) 드디어 완공하게 되었다. 이 엄청난 불사를 진행하면서 스님 스스로에게도 신비한 일이 일어났지만, 또 다른 스님이 오그라들어 백방으로 노력해도 펴지지 않던 공주의 손가락을 펴지게 하여 숙종이 전폭적으로 경비를 지원했다는 설화도 전해온다. 이런 인연으로 숙종이 친히 각황전(覺皇殿)이라는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각황전 오른쪽의 홍매는 준공의 기쁨을 기리기 위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

화엄사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지만 국보(제67호)로 지정된 것은 이 각황전뿐이다. 화엄사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1711년(숙종 37년) 스님은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 즉 조선의 모든 스님을 지휘 감독하는 권한이 주어지면서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승군의 책임자가 되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성을 완성하고 승병이 머물 12개의 사찰을 짓고 화엄사로 돌아와 수도 서울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북한산성의 구조, 시설과 축성 과정, 지형과 고적 등을 정리한 지리지 북한지(北漢誌`서울시유형문화재 제301호)를 남겼다.

그러나 계파 성능 스님이 언제 태어나 언제 돌아가셨는지, 속가의 성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숙종이 내렸다는 현판에는 글씨를 쓴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1657~1710)의 이름은 또렷이 남아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나마 준공 후 스님이 심었다는 홍매가 때맞춰 꽃을 피워 사부대중은 물론 속계의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어 다행이다. 장륙화(丈六花)라고도 하고 꽃이 검붉어 흑매화(黑梅花)라고도 한다는 알림판의 설명이 있다.

일행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꽃향기에 취하다가 발길을 돌려 운조루를 거쳐 이른 바 ‘산청 3매’로 불리는 덕천의 남명매, 단속사지의 정당매, 남사리의 원정매를 찾았으나 아쉽게도 꽃이 져서 둥치만 보는 것으로 탐매(探梅) 일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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