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고승 자장율사와 정선 정암사의 주목(朱木) - 2013년 04월 18일 -
아트코리아 | 조회 418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고승 자장율사와 정선 정암사의 주목(朱木)
스님이 꽂은 지팡이 푸름 잃지 않아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정선은 아라리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세 그루의 나무가 있다. 첫째는 군청 앞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뽕나무 두 그루(강원도기념물 제7호)이고, 둘째는 정암사에 있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심었다는 주목(朱木)이 그것이다.

태백산 정암사는 자장율사가 직접 창건한 절이기도 하지만, ‘삼국유사’에 그 창건 내력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권제4, 의해(義解)편 제5 ‘자장정률’(慈藏定律)조의 자장율사와 정암사 창건 내력은 다음과 같다.

“대덕 자장은 김 씨로서 본래 진한의 진골 소판(蘇判`신라의 3등급의 벼슬) 무림의 아들이다.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천수관음보살에게 자식 하나 낳기를 기원하면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희사하여 불법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다리로 삼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공교롭게도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이었다.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고 했다.

정신과 뜻이 맑고도 슬기로웠으며 문장이 날로 더했으나 속세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양친이 일찍이 세상을 뜨자 마침내 처자식을 버리고 토지와 집을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세웠다. 홀로 깊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호랑이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죽은 사람의 뼈, 시체가 썩어서 백골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법)을 닦으면서 조금이라도 게을러지고 피곤한 기색이 있으면 곧바로 작은 방을 만들어 주위를 가시덤불로 둘러치고 그 속에서 벌거벗고 앉아서 움직이면 번번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대들보에 매달아서 정신이 흐려짐을 막았다.

<중략> 만년에 경주를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그곳에 거처했다. 북대에서 보았던 이상한 스님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보리라’. 자장이 깜짝 놀라 일어나 일찍 송정에 가보니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와 계신지라 불법의 요지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으로 가서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에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 수행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여기가 바로 갈반지(葛蟠地)이다’하고는 석남원(石南院`오늘날 정암사)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어떤 늙은 거사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는 자장을 수행하는 제자에게 말하기를 ‘자장을 만나 보려고 왔다’고 했다. 제자가 말하기를 ‘스승을 받들어 모신 이래로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느냐?’라고 하자 거사가 말하기를 ‘너의 스승에게 알리기만 해라’라고 하여 마침내 들어가 고하니 자장이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아마 미친 사람인 모양이다’라 했다. 제자가 밖으로 나가 꾸짖어 내쫓자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하고는 삼태기를 뒤집어 떨자 개가 변하여 사자보좌가 되니 그 위에 올라앉아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이 사실을 들은 자장이 그제야 몸가짐을 바로 갖추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 위로 달려 올라가니 벌써 까마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마침내 몸을 던져 죽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외도 당나라로 유학 가서 계를 받은 이야기, 선덕여왕이 태종에게 신라로 돌아오게 간청했다는 이야기, 대통이 되어 승풍을 바로잡은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일부만 소개했다.

스님은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통도사 등 많은 절을 창건했다. 따라서 스님이 창건한 어느 한 절 스님의 체취가 서려 있지 않는 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인연이 깊은 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정암사(淨岩寺)일 것이다. 부처님의 머리뼈 사리, 치아 등을 이곳에 모셨고, 자신의 육신 또한 이곳에 묻으셨기 때문이다. 스님은 증표라도 남기려는 듯 적멸보궁(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 옆에 평소 애용하던 주장자(지팡이)를 꽂으니 오늘날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도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지 원줄기는 마르고 그 속에서 다시 싹이 나서 자라는 이적(異蹟)을 보여 스님의 지극한 불심을 실감하게 한다.

 

- 2013년 04월 18일 -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