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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현풍인 단곡 곽진과 영주 단곡리 은행나무 - 2013년 04월 11일 -
아트코리아 | 조회 387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현풍인 단곡 곽진과 영주 단곡리 은행나무
유일하게 ‘단곡’을 기억할 수 있는 나무

 

국립공원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영주시 단산면은 시골의 한적한 면(面)에 불과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전국적인 이슈를 낳았다.  첫째는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포도산지라는 점이고, 둘째는 면 이름 단산(丹山)을 소백산면(小白山面)으로 바꾸려다가 같은 소백산 권역인 이웃 단양군의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소백산 남쪽에 있으니 차라리 ‘소백산남면’이라고 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둘러보고 부석사로 가다 보면 길 바로 옆에 큰 은행나무가 서 있는 ‘단곡(丹谷), 진막(陣幕)’이라는 마을이 있다.

앞산은 병장산(兵藏山)이고 마을은 진막인데 고려와 신라가 싸울 때 진막(軍營`군영)을 친 곳이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단곡인데 조선 명종 시 영남오현의 한 분으로 3대에 걸쳐 소수서원 원장을 지낸 단곡(丹谷) 곽진이 이곳에 정착하여 그의 호를 따랐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은행나무는 그가 심은 것으로 전해온다.

그러나 고려와 신라가 싸울 때 군영을 처서 진막이라고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은 싸우지도 아니하고 나라를 고려에 바쳤기 때문이다. 고려가 아니고 고구려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삼국시대 초기의 영주는 물론 더 남쪽 지방까지 고구려가 차지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본관이 대구 현풍인 곽씨들이 영주 일대에 정착한 것은 단곡의 아버지 한(澣)때부터라고 한다. 판관을 지낸 할아버지 자보(子保)가 처의 고향인 봉화현으로 와서 살다가 아버지가 풍기 고로촌(古老村)으로 옮겼으며, 출세의 뜻이 없었던 공이 소백산 아래 진막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공은 아호가 단곡(丹谷)으로 아버지 한과 어머니 평해 황씨(平海黃氏) 사이에 1568년(선조 1년) 태어났다. 광해군이 왕자로 있을 때 스승이었던 송소 권우(權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을 읽고 둘째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 참가했다.

1601년(선조 3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심취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깊이 빠졌다. 1605년(선조 38년)에 광릉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곧 물러났다.

1618년(광해군 10년) 아들 영(瓔)이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참형을 청하는 상소를 했다가 투옥되어 죽자, 공이 앞장서서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집권층이 이러한 올곧은 선비인 공을 비난하는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적 곽영을 보건대 그가 나고 자란 곳은 풍기인데 풍기는 바로 유영경(柳永慶)의 처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의 아비인 곽진은 마치 노예처럼 영경의 문에 드나들었는데 그 역시 영경의 처조카인 황유중, 유첨 형제와 친형제 이상으로 절친하게 지내면서 영경을 위해 복수할 음모를 밤낮으로 꾸몄다’고 했다.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은 선조가 죽음을 앞두고 어린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이른바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자 소북파의 영수로 이이첨과 맞섰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이첨의 전횡에 반대하는 단곡으로서는 그와 돈독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두고 실록은 ‘마치 노예처럼 영경의 문을 드나들었다’고 비하했다.

시문에 능했으며, 장현광`이준`정경세 등 명사들과 교유했다. 1633년(인조 11년) 생을 마감했으며 저서로 ‘단곡집’이 있다.

공은 학문이 높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근엄하여 원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제자가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수서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잃어버렸던 장서를 되찾았으며, 서원 내 곳곳에 꽃과 나무를 심어 환경을 아름답게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은거한 곳의 지명만 ‘단곡’으로 남아 있을 뿐 마을에는 한 가구의 후손도 없었다.

따라서 지금 공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뿐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누군가 후세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게 하려면 거창하게 빗돌을 세우기보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하겠다.

 

- 2013년 04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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