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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반남인 소고 박승임과 영주 삼락당 향나무 - 2013년 04월 04일 -
아트코리아 | 조회 397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반남인 소고 박승임과 영주 삼락당 향나무
전선 때문에 윗부분 계속 잘려 씁쓸

 

경북 북부지방의 소도시 영주가 뜨고 있다. 아름다운 국립공원 소백산과 풍부한 선비문화자산, 인삼과 사과 등 우수한 농산물을 조화롭게 활용하여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잘 조성된 소백산 자락 길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자기 극복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고자 하는 선비정신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기에 그렇다.

영주시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2년 연속 한국 관광의 별로 ‘소백산 자락길’(2011)과 ‘선비촌’(2012)이 선정되는 영예를 가져오게 했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영주는 안향 등 많은 선비를 배출했는데 조선 전기의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도 그중 한분이다.

공의 본관은 반남(潘南`전남 나주시 반남면)이다. 시조 박응주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서 215명의 문과 급제자, 정승 7명, 대제학 2명, 공신 5명, 호당에 뽑힌 분 6명, 문묘에 배향된 분 1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들이 영주에 자리 잡은 것은 소고의 할아버지 박숙이 고모부인 이중(李重)이 안동부사로 올 때 같이 내려와서 능성 구씨 집안에 장가들어 처의 고향인 안동에 정착했다가 아버지 박형(朴珩)이 영주의 예안 김씨와 혼인하여 그 역시 처의 고향인 영주에 자리 잡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때가 1500년대이다.  

공은 퇴계의 제자로 1540년(중종 35년) 24세로 셋째형 승간(承侃)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스승인 퇴계와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충언을 담은 1만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명망이 세상을 떨치자 세도가인 윤원형이 심복을 보내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그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년)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다시 귀향, 복(服)을 벗은 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명종 12년)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지자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그 이듬해 풍기군수로 임명되어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의 낡은 영정을 새로 그리게 하고, 호조에 건의해 재정을 충실히 했다.

1565년(명종 20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얼마 뒤 진주목사로 나아갔다. 1569년(선조 2년)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선조 4년) 황해도관찰사, 1573년(선조 6년) 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묵은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는 한편,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펼쳤다.

1576년(선조 9년) 도승지에 재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선조 14년) 춘천부사에 나아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무고로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많은 서적을 읽었으며, 특히 ‘논어’와 주자서를 탐독하여 스승인 퇴계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륵 등 60여 명의 후학을 배출했으며 그중 9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구강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그 후 훼철되었다)에 제향되었다.

영주시 문정동 한정마을에는 삼락당(三樂堂)이 있다. 소고의 손자 삼락당 박종무를 기리는 곳이나 원래는 소고의 아들 취수헌 박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하여 하한정(夏寒亭)이라 했다.

그 앞에는 공이 심고 때론 타고 다니던 말을 매어두기도 했다는 향나무가 있다. 수령 400여 년이라고 하니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사직하고 귀향한 그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예 박찬우(전 대구동성로번영회장) 님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나무 위를 지나가는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윗부분을 계속 잘랐던 것 같다. 생명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 2013년 04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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