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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낙향 때 심은 나무, 당시엔 특이한 홍매
아트코리아 | 조회 383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낙향 때 심은 나무, 당시엔 특이한 홍매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는 ‘남사예담촌’으로 불리는 매우 독특한 마을이다. 주민 스스로 남도의 하화마을이라고 자부하듯이 우선 외형적으로 고가가 즐비할 뿐 아니라, 고려 후기 문신으로 찬성사를 지낸 하즙(河楫)으로부터 한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곽종석(郭鍾錫)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 이외에 더 특별한 것은 마을을 유학의 종조 공자(孔子)의 고향과 같이 설정했다는 점이다. 즉 앞산을 이구산(尼丘山)이라 하고,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내를 사수(泗水)라 한 점이 그것이다.

공자는 이름이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인데 이는 어머니 안 씨가 이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수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 흐르는 강이다.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여겼던 조선의 선비들이 그가 은거한 곳의 산을 이구산이라 하고 주자의 고향을 본떠 마을을 신안(新安), 뒷산을 자양산이라고 한 예는 몇 군데 있다.

 

그러나 통째(?)로 마을 이름으로 빌려 쓴 곳은 이곳이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곳이 아닌가 한다. 사람의 인격 형성에 주변 환경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마을의 또 다른 자랑거리의 하나인 원정매(元正梅)는 진양 하씨 사직공파 입향조 하즙이 심은 것으로 전해 온다.

 

공은 아호가 송헌(松軒)으로 1305년(충렬왕 29년) 남사리(당시 여사촌)에서 아버지 하직의와 어머니 진주 정씨 사이에 태어나 1324년(충숙왕 11년)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가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다. 일부 권세 있는 사람들이 원에 빌붙어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이나, 토지를 빼앗아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를 척결하고 민생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도감을 설치했다.

공은 정치관(整治官)에 임명되어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안렴사를 겸해 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이때 한미한 가문 기자오의 딸이 원나라 순제의 제2비가 되어 왕자를 낳았다. 따라서 그의 아들 기철은 벼슬이 정승의 반열에 오르고, 기철의 4촌 동생 기삼만(奇三萬)을 비롯한 기씨들의 횡포가 도를 넘고 있었다.

 

이에 공이 기삼만을 잡아 가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처가 이 사실을 기황후에서 고자질하자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 처벌을 지시하니 공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국문을 당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공은 경주 부윤으로 나아가고 1372년(공민왕 21년) 문하찬성사로 승진했다. 1377년(우왕 4년) 진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허형 등과 도의계(道義契)를 맺어 소일하다가 1380년(우왕 7년)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였다.

아들 윤원(允原) 역시 문과에 급제해 여러 도의 안렴사와 원주, 상주의 목사를 지내고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증손자 연(演)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진양 하씨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후에 원정(元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은 개경의 집에 매화를 심어 놓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집 뒤뜰에 일찍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더니,

(舍北曾栽獨樹)

추운 날씨에 꽃이 아름답게 나를 위해 피었구나.

(臘天芳艶爲吾開)

밝은 창에 글 읽고 향을 피우고 앉았으니

(明窓讀易焚香坐)

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아주 잊을 만하네.

(未有塵矣一點來)

 

이 시는 현재 공이 심은 매화나무 아래 빗돌에 새겨져 있다. 매화 이름 원정은 공의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낙향할 때 가져와 심은 것으로 보면 수령이 640여 년 정도 된다. 현존하는 나무에 대해 원래 것은 죽고 떨어진 씨앗에서 새로 싹이 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나 원 둥치의 싹이 자란 것 같다. 고매(古梅)로서는 특이하게 꽃이 붉다. 많은 선비들이 백매(白梅)를 좋아했던 것에 비하면 이점도 특이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 조경적인 가치는 홍매가 더 높다. 이 역시 유전자 보존이 시급하다. 공이 살던 분양고가(汾陽古家)에는 대원군의 친필 ‘원정구려’(元正舊廬), 즉 ‘원정이 살던 옛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고종 연간 강계부사를 지낸 하겸락과 삼척진 영장을 지낸 하용제 부자가 대원군과 교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 2013년 0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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