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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지리산 거인’ 창녕인 남명 조식과 산청 남명매
아트코리아 | 조회 297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지리산 거인’ 창녕인 남명 조식과 산청 남명매


온갖 풍상 속에서도 선비의 향기 여전

 

경남 산청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자연과 문화유적의 보고가 아닌가 한다. 지리산과 경호강 등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경관도 그렇지만 화려한 철기문화를 꽃피웠으면서도 역사의 뒤꼍에 묻혀 있는 가야(伽倻)의 마지막 왕 구형이 몸을 의탁한 곳이요, 목화씨를 몰래 가져온 문익점의 고향이자, 영원한 처사(處士)로 불리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이 학문과 제자 양성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 고장이며, 신의(神醫) 유이태와 이 시대의 참스님 성철 역시 이곳에서 태어난 점이 그렇다.

 

영남학파 양대 축의 한 분인 남명을 기리는 덕천서원에 닿으니 큰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앞이 강당이고 뒤가 사당인 구조는 경상도 여느 지역의 서원과 다를 바 없었지만 강당 처마 밑에 심어 놓은 조경수가 차(茶)나무라는 사실이 조금은 이채로웠다.

덕천강을 따라오면서 차나무가 더러 보였지만 이곳이 지리산 아래라 기온이 낮을 것인데도 전남 보성이나 경남 하동과 같이 차나무가 잘 자라는지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 산천재로 발길을 옮겼다. 1560년(명종 15년) 노년에 남명이 직접 심었다는 매화가 만개했다. 이웃에 있는 정당매가 꽃잎이 다섯 장 홑꽃인 데 비해 겹꽃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흔히 경상도를 인재의 보고라고 한다. 좌도의 퇴계 이황(退溪 李幌`1501~1570)과 우도의 남명 조식이 경쟁적(?)으로 인재를 길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명은 끝까지 벼슬을 사양해 처사로 일관했고, 퇴계는 벼슬길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였듯이 두 분이 세상을 보는 가치관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를 대변하는 일이 임진왜란의 대처 방법이었다. 퇴계의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전란 수습에 매진한 반면에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은 재야에서 국난 극복에 앞장선 점이다.

 

남명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의 근무처인 서울로 올라가서 글을 배웠으며 단천군수로 자리를 옮기자 선생 역시 그곳으로 따라가서 경서는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수학, 진법(陣法)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1520년(중종 15년) 생원 1등, 진사 2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많은 선비들이 희생되고 숙부마저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단념했다.

 

1530년(중종 25년) 처가가 있는 김해로 자리를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을 닦으니 성운, 이원, 이희안, 신계성 등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 몰락한 사림의 사기를 북돋우었다. 1548년(명종 3년)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고 그동안 쌓은 경륜을 토대로 국정 개혁에 관한 소를 올리는 등 사림의 영수로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선생의 폭넓은 식견을 반영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니 명망은 오히려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더 높아졌다.

 

말년이 되어 지리산 자락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매화 한 그루를 심고 마지막 거처로 잡았다. 선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이 깊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가 의원을 보내 치료를 해 주려고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도착하기 전 1572년(선조 5년)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였다. 임금이 크게 슬퍼하며 신하를 시켜 제사를 지내주고 대사간을 증직했으며 광해군 때에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덕천, 신산, 용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남명집’과 ‘학기유편’(學記類編) 등이 있다.

 

남명을 일러 ‘지리산의 거인’이라고 한다. 체구가 커서 그렇게 불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세와 부를 탐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정신이 지리산의 메아리처럼 시대를 초월해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이 심은 매화는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이겨냈지만 이제는 인공 수피(樹皮)에 의존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오늘 맡는 향기가 그래서 더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또 다음 세대에도 향기가 전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으면 한다.

 

- 2013년 03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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