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주인 통정 강회백과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
아트코리아 | 조회 512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진주인 통정 강회백과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
절은 사라졌지만 매화는 고결한 자태 드러내

 

월 하순이면 전남 광양시의 섬진마을에는 100만여 그루에서 피는 매화꽃을 보려는 인파들로 백운산이 무너질까(?) 겁이 날 정도라고
 한다.

 

꽃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농가에서 생산한 간장, 된장, 베개 등 다양한 매실 관련 제품을 구매하여 개별농가의 수입이 늘어남은 물론 광양 일대의 숙박시설이나 음식점도 호황을 누려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매화를 보려는 관광객과 관련 상품 판매 수입이 늘어나자 광양시에서는 전국의 어느 기초자치단체에도 없는 ‘매실정책팀’을 조직해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인근의 경남 산청군을 생각해보았다. 산청에는 어느 군에도 없는 정당매, 원정매, 남명매 등 이른바 ‘산청 3매’가 있다.

 

정당매는 여말 통정 강회백(姜淮伯`1357~

1402), 원정매는 원정(元正) 하즙(河楫), 남명매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손수 심은 매화나무다. 따라서 짧게는 400여 년 길게는 600여 년 동안 산청을 지켜온 고매(古梅)들이다.

 

강릉 오죽헌이나 순천 선암사 등 전국적으로 이름난 고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은 사람이 알려진 매화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산청 3매는 산청군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이자 자원식물이다. 그런데도 이를 활용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주민소득사업으로 활용하려는 데 미흡했던 것 같다.

 

없는 것도 새로 만들어 지역의 가치를 높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다른 지자체에 비해 문제의식이 낮다고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와 ‘한방약초축제’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묘목을 많이 생산해(접을 붙여야 형질이 그대로 유지된다) 정당매를 보러 가는 길 주변이나 남사리 일대, 산천재 부근 등 곳곳에 무리지어 심어 놓으면 머지않은 장래에 관광객이 찾을 것이고 열매가 열리면 이를 이용한 식품이 개발되어 소득도 증대될 것이다.  

 

특히 정당매는 통정의 손자 강희안(姜希顔`1417~1465)에 의해 심은 내력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매화나무다.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의 ‘매화’ 편에

 

‘우리 선조 통정(通亭`할아버지 강회백을 말함)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때 절 마당 앞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천지의 기운이 돌아가고 또 오니/ 하늘의 뜻을 납전매(臘前梅`세한에 피는 매화)에서 보는구나/ 바로 큰 솥 가득 맛있는 국을 끊이는데/ 하염없이 산속을 향해 졌다가 또 피는구나

 

공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조정에 있을 때 옳고 그름을 분간하여 바로잡고 조화로써 서로 돕고 구제한 일이 매우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시참(詩讖`시를 쓴 것이 뒷날 뜻밖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속사의 스님이 공의 덕과 재주를 사랑하고, 깨끗하고 높은 인격을 흠모하여 매년 뿌리에 흙을 북돋아 주고 가꾸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전해져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른다. 그 가지와 줄기는 굽어져 온갖 모양을 이루고 또한 푸른 이끼가 감싸고 있으니 ‘매보’에서 말하는 고매(古梅)와 차이가 없다. 이것이 진정 영남의 고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로부터 왕의 명령을 받들어 영남으로 가는 사대부(士大夫)는 이 고을에 이르면 모두 절을 찾아 매화를 둘러보고서 운(韻)을 빌려 시를 지어 처마 밑에 걸어 두었다.’

 

이 글을 통해서 정당매는 시`서`화에 능했던 강희안의 조부 통정이 고려 말에 심었다는 것과 조선조 초 이미 영남의 명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정이 매화를 심은 단속사는 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나 5세기 전에 이미 폐사가 되었다. 대웅전 앞에 있었을 3층 두 석탑(보물 제72호와 제73호)만 없었다면 그곳이 신라의 천재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고, 통정이 과거(科擧) 공부를 했다는 단속사 터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그러나 절은 없어졌지만 매화는 남아 탐매객(探梅客)들의 제1번 답사코스가 되었다.

 

우리나라 의류 혁명을 일으킨 문익점 선생이 몰래 가져온 목화를 전국에 퍼뜨린 시배지 또한 산청이다.

 

이정웅(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 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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