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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충주 충렬사 주목
아트코리아 | 조회 672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충주 충렬사 주목
1978년 충렬사 일대 성역화하면서 심은 나무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그가 성인이든, 평범한 시민이든 누구에게나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 자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가하는 사람의 잣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물이 박정희(朴正熙`1917~1979) 전 대통령이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땅에 가난을 몰아낸 ‘영웅’으로 부르는 사람들로 대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후자로 여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일본인 장학사와 충돌로 교직을 사직했다.

 

1940년 만주로 건너가 그곳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에 입학,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 대위로 임관되어 육군본부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동료 장교들의 탄원으로 다시 문관으로 복귀했다. 한국전쟁 때 소령으로 참전했다. 1953년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이후 육군포병학교, 제2군단 포병사령관, 제5`7사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을 역임했다.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소장)으로 재직할 때 ‘5`16군사혁명’을 주도했다.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해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했다. 그는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당 및 사회단체의 해산, 용공분자와 깡패 검거 소탕, 부정축재자금 환수 등 전면적인 사회개혁을 단행했으며,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켜 생활 간소화, 가족계획, 문맹퇴치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 후에도 농어촌 고리채 정리,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소위 ‘조국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굴욕외교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고, 월남전에 국군을 파병하여 절대빈곤국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일부 국민의 반대가 있었으나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유신체제를 선포, 비상계엄령을 통해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경제개발계획으로 국민소득은 향상되었으나, 빈곤층이 늘어나고, 장기집권의 폐단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면서 지지가 약해지기 시작하자 긴급조치로 이를 막았다.

 

이때 주식인 쌀이 완전 자급되었고 100억달러 수출이 달성되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1천100달러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1978년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일어난 부마사태 해결방안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중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다. 외가가 있는 곳으로 지난 선거 때 많은 성원을 보냈던 충북 충주에는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다. 그곳 경내의 주목(朱木)은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대를 성역화하고 기념으로 심은 나무다.

 

이외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충사, 도산서원, 오죽헌, 채미정 등 전국 곳곳에 많은 나무를 심었다. 모두 허물어져 풀만 무성하던 선현의 유적지를 새로 단장하고 기념으로 심은 나무들이다. 이런 면을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땅에 가난만 몰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부유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경제부흥, 국민행복과 함께 역대 여느 대통령과 달리 ‘문화융성’을 국정지표로 밝힌 것도 이런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한다.

 

중국 고사에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말이 있다. 모택동과 등소평을 높이 받드는 이유가 그들이 흠이 없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흠보다 공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는 날 인근 주민들이 전나무 한 그루를 선물했다. 겨울에도 푸른 상록수처럼 초심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 같기도 하지만 전나무는 평소 육영수 여사가 좋아하던 나무라서 더 인상 깊었다.

 

- 2013년 03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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