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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법정 스님과 송광사 불일암 일본목련
아트코리아 | 조회 788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법정 스님과 송광사 불일암 일본목련
스님이 심고 가꾼 나무…유해까지 묻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법정(法頂) 스님의 입적(入寂)은 나라 안팎의 많은 국민을 슬프게 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부정과 비리, 위장 전입과 땅 투기가 난무하는 세상에 철저히 무소유(無所有)로 사셨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특히, 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 나무 관(棺) 하나 만드는 것조차 거부했다. 스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난 키우기를 예로 든 구절과 ‘설해목’에서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라는 구절에서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하고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던 생각을 조금은 바뀌었기 때문이다.

송광사 산내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은 스님이 오래 거처한 곳이기도 하지만 육신이 잠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10년 4월 28일 49재를 마친 스님의 유해는 손수 심은 일본목련 나무 밑에 안장되었다.

스님은 1932년 일제강점기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23세가 되던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959년 해인사 전문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조계산 송광사 등에서 수행했다.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을 출간하고 이듬해 불교신문사 논설위원과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등 현실정치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을 받고 불일암으로 돌아왔다.

1976년 대표작 ‘무소유’를 출간했다. 그 후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을 거쳐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가서 홀로 정진하기도 했다. 1993년 프랑스 최초 한국사찰 길상사를 파리에 창건하고 이듬해에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창립하여 서울, 부산 등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법문을 펼쳤다.

1995년 김영한으로부터 대원각을 시주로 받아 조계종 말사로 등록하였으며 1998년 명동성당 100돌 기념 초청 강연을 하는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편협하지 않았다. 2010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나니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했다.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텅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순천에서 송광사 가는 대중교통은 시내버스로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매표소를 지나 한참 올라가다가 개울을 건너기 전 왼쪽으로 접어들면 불일암 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잡목이, 다음에는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졌다가 곧이어 왕대, 마지막은 이대 숲길이다.

원래 자정암(慈靜庵)이었다고 한다. 스님이 새로 꾸미고 이름을 불일(佛日)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불일은 고려시대 불교 개혁의 중심 스님이었던 보조국사의 시호인 만큼 스님이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암자는 정갈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스님의 유해가 묻힌 나무는 생각보다 컸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태산목, 굴거리나무, 벽오동, 산수유, 편백나무, 꽝꽝나무 등 스님이 손수 심고 가꾼 나무들이 많았다.

언론에서 스님의 유해가 묻힌 나무를 두고 후박(厚朴)나무라고 했으나 실제 이름은 ‘일본목련’(日本木蓮)이었다. 목련과의 일본 원산으로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낙엽수다. 반면에 후박나무는 제주도 등 섬 지방이나 전라도, 경상도 남해안에 주로 자라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지 않는 녹나무과의 상록수다.

울릉도에는 후박나무가 많아 군목(郡木)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특히 울릉도의 명물 ‘호박엿’을 두고 원래 후박나무로 만들었는데 발음이 변해 호박엿이 되었다고 하는 설과 당초부터 호박으로 만들어 호박엿이 되었다고 하는 두 설에 대한 논쟁은 현지에서도 아직 가려지지 않을 만큼 치열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선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원래부터 주원료가 ‘호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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