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경주인 일암 김언헌과 포항시 봉계리 분옥정 소나무
이정웅 | 조회 653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경주인 일암 김언헌과 포항시 봉계리 분옥정 소나무


이상적인 마을 발전에 정신적 지주 역할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는 신라 왕손인 경주 김씨 ‘치동문중’(致洞門中)의 집성촌이다. 입향조 일암(逸庵) 김언헌(金彦憲)이 청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울창한 산림을 손수 벌채하고 터전을 잡으니 벌치동(伐致洞)이 된다. 그러나 벌 자의 어감이 거칠게 느껴져 벌 자를 떼어내고 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가 1636년(인조 14년) 공의 나이 27세 되던 해 늦가을이었다.

윗대는 충청도에 살았다. 고조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이 크게 현달하여 연산`중종 양조의 문신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그나마 임진왜란으로 가세가 다소 기울어진 것 같다.

따라서 사헌부 집의(종3품)를 지낸 아버지 김업(金嶪)이 가족을 이끌고 청도 금천으로 이거했다. 공은 집의공(執義公)과 어머니 숙부인 문화 류씨 사이에 1609년(광해군 1년) 삼 형제 중 차남으로 청도에서 태어났다.  

치동은 기계천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 농사짓기에 알맞고, 뒤쪽은 봉좌산이 우뚝 솟아 계곡이 깊어 은거에 좋은 곳이다. 공이 이곳에 자리 잡은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그들에게 인조(仁祖)가 무릎을 꿇고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으니 아마도 공은 그런 환란으로부터 스스로 몸을 지키고자 미리 이곳을 점지했던 것 같다.  

공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명문의 후예답게 자기 수양과 자녀 교육,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682년(숙종 8년)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였다.

공의 이러한 후손들을 위한 배려가 헛되지 않아 증손 돈옹 김계영(金啓榮)에 이르러 빛을 발했으니 1693년(숙종 19년) 마침내 약관 19세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듬해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이 노론으로 바뀌는 등 세태가 어수선하자 돈옹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했다.

그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용추의 상류 용계를 따라 50m쯤 이목골 여울의 바위에 새겨진 세이탄(洗耳灘)이라는 음각문자에서 알 수 있다. 중국의 고사 영수세이(潁水洗耳)가 말하듯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변하지 않는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후 낙재 태노(泰魯)가 다시 진사에 급제하고, 하곡(下谷) 김시원(時元), 학파(學坡) 김시형(時亨) 형제가 1768년(영조 44년) 남덕재(覽德齋, 판서 홍기섭의 친필 현판)를 건립해 후학 교육에 힘을 써서 한적한 시골 마을에 글 읽는 소리가 넘치면서 문향으로 자리 잡았다.

대구시청과 내무부에 근무하다가 학자로서 입신하고 고향 발전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대구과학대 김석종(공학박사) 총장으로부터 한 번 가보자는 연락을 받고 기꺼이 동행했다. 우선 ‘분옥정’(噴玉亭`경북문화재자료 제267호)을 먼저 찾았다.

마을 초입이 너무 평범해 이런 곳에 정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것이 입향조가 심은 큰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고, 관지(觀之) 김종해가 심은 보기 드문 뚝향나무도 있어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함께 경내가 아주 정갈했다.

분옥정은 돈옹의 학덕을 기리고자 관지가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집터를 선뜻 내 놓고 김종한이 여러 종인을 참여시켜 1820년(순조 20년)에 지은 정자다.  

비좁다 싶은 문을 열고 누마루에 올라서니 마주 보이는 것은 높은 층석으로 다양한 문양이 화가가 그림을 그린 것 같고, 아래는 기암괴석으로 계곡의 맑은 물이 작은 폭포를 이뤄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옥을 뿌린 듯하여 분옥정이란 이름을 지은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용계정사(龍溪精舍)와 화수정(花樹亭)은 유당(酉當) 김노경(金魯敬)이, 분옥정(噴玉亭)과 청류헌(聽流軒)의 현판은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며, 화수정기문은 추사(秋史)의 6촌으로 좌의정을 지낸 김도희(金道喜)가 썼다.

같은 경주 김씨이기는 하지만 당시 권세가였던 추사(秋史) 집과 교류를 했다는 것은 치동문중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이다.

여느 정자와 달리 출입은 건물 뒤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곡물을 향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T자형 평면을 갖춘,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이 정자 건축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누마루에 앉아 보면 서북쪽 계곡에 가지가 아주 많은 만지송이 있어 정자의 품격을 한껏 높여준다.

특히, 별채의 부속건물인 서고가 눈을 끌었다. 김 총장에 의하면 한때 장서로 꽉 찼었는데 언젠가 없어졌다고 한다. 김 총장은 분옥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봉좌산 숲길 조성, 농촌마을 종합개발 사업, 철기농촌 주제공원 조성, 승마장 건설, 수변공원 조성 사업 등이 정부의 정책 사업으로 선정되는 데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개기(開基) 400년을 앞둔 치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선비정신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상적인 농촌으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입향조가 심은 큰 소나무의 정령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다.

 

- 2013년 02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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