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파평인 윤탁과 성균관의 명륜당 은행나무
아트코리아 | 조회 810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파평인 윤탁과 성균관의 명륜당 은행나무


국내에서 유주(乳柱)가 가장 잘 발달된 나무

 


조선(朝鮮) 인재의 산실인 성균관 내 명륜당 앞에는 큰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가 있다. 소위 ‘행단’(杏壇)이라고 하여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데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은행나무는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최고 공교육(公敎育)기관인 서울의 성균관으로부터 지방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많이 심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 사실로 굳어진 사례다.

 

공자의 고향 산동성 곡부의 사당(祠堂) 앞의 행단은 공자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송(宋)나라 진종 때에 단을 쌓고 살구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훗날 금(金)나라의 학사 당회영이 이곳을 찾아 행단이라는 두 글자를 쓴 빗돌을 세우자 그 후부터 행단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사실은 강희맹, 이수광, 정약용 등 조선의 선비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의견일 뿐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은행나무로 알고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살구나무를 과거 급제나 학문성취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겼다. 당나라에서는 중요 인재를 과거를 통해 선발했는데 합격자에게는 수도 장안의 동남쪽에 있는 곡강의 살구나무 꽃이 만발한 행원(杏園)에서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축하연을 베푸는 풍습이 있었다.

 

나무를 번역함에 있어서의 실수는 비단 살구나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곡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로 시작되는 슈베르트의 ‘보리수’(菩提樹) 역시 피나무를 오역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잘못이 더 현실적이었다는 점이다. 행단의 나무를 살구나무로 정확히 알았고, 피나무를 보리수로 오역하지 않았다면 전자의 경우 오늘날 전국에 남아 있는 많은 은행나무 노거수를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노랫말은 지금보다 더 정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성균관의 은행나무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성전환설(性轉換說)이다. 당초 심었던 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철 열매가 많이 열려 냄새가 고약했을 뿐 아니라, 은행을 주우려는 사람들로 엄숙해야할 학교가 소란스러워지자 제를 올려 수나무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이는 사리에 맞지 않은 것으로 나무가 자라면서 성이 전환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성균관의 은행나무는 1519년(중종 14년) 대사성 윤탁(尹卓)이 심었다고 전해온다.

공은 본관이 파평(坡平)으로 아호는 평와(平窩)이다. 현감 사은(師殷)과 어머니 운봉 박씨 사이에서 1472년(성종 3년)에 태어났다.

 

김굉필의 문인이자 이심원에게 수학하였다. 1501년(연산군 7년) 문과에 급제해 사관을 거쳐 전적이 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삭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성`대사성`동지성균관사를 역임했으나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되었다. 1525년(중종 20년) 대사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뒤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동지사를 거쳐 1534년(중종 29년) 개성부유수를 역임하고 같은 해 별세했다. 학문이 높아 조광조 등 여러 대신들에게 도학을 가르쳤고 송인수`이황 등도 공의 강의를 받았다고 한다. 홍섬`원혼 등 같은 벼슬에 있던 사람들로부터도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학생들의 존경을 받아 관례를 무시하고 대사성에 중임되기도 했다.

 

성균관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유주(乳柱)가 가장 잘 발달된 나무다. 지름이 10㎝가 넘고 길이가 100㎝에 가깝다. 경남 의령군 세간리 의병장 곽재우 장군 기념관 앞에 있는 은행나무 유주의 경우 아낙네들이 이것을 보며 젖이 많이 나오도록 비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생긴 것 자체가 유두(乳頭)를 닮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이 유주가 왜 달리는지에 대해서는 ‘호흡작용을 도와주는 돌기’라고 하는가 하면 ‘늙은 은행나무의 비상식량’이라는 등 이견이 분분할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성균관에는 명륜당 앞에 2그루, 대성전 앞에 2그루 모두 4그루의 은행나무가 있고 크기도 비슷하다. 그런데도 1그루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점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서 표제를 ‘서울 성균관 내 은행나무’라고 하지 않고 성균관의 부속건물의 하나인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라고 한 점은 우리의 전통교육을 폄하하려는 일제의 잔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2013년 02월 14일 -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