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원주인 양정공 변협과 해남의 수성송
아트코리아 | 조회 463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원주인 양정공 변협과 해남의 수성송
왜침으로부터 성을 지킨 것을 기려

 

땅끝마을로 잘 알려진 전남 해남은 기후가 온난하고 삼면이 바다로 싸여 있어 해산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간척지로 조성한 넓은 평야가 있어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런 풍요로운 시대가 열리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결렸다. 적어도 16세기만 하더라도 잦은 왜구의 약탈로 피해가 심각했다. 특히, 임진왜란 37년 전인 1555년(명종 10년) 5월 왜구들이 선박 6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도 남해안 쪽을 침범하여 영암성, 장흥성, 강진성 등을 함락하고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했던 을묘왜변(乙卯倭變)에는 피해가 더욱 심각했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기록하고 있다.

‘국조 이래로 태평한 지 수백 년이 되어도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달량(達梁`해남군 북평면) 왜변이 생겼으므로 각 고을을 지키는 장수들이 풍문만 듣고 도망하여 무너지니 적들의 기세가 날로 치열해지므로 중외가 크게 진동하였다. <중략> 이때 해남성 하나는 현감 변협(邊協)을 힘입어 극력 수비하고 때때로 나가 분산(分散)하여 도적질하는 적들을 잡았으므로 이로 인해 함락되지 않았다.’

전문을 다 옮겨오진 못했지만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어야 할 관료들의 태도이다. 조정에서 파견한 명망이 높은 병조판서는 물론 관찰사, 방어사 등이 모두 적과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피해 다니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그중에도 참다운 공직자가 있었으니 성을 굳게 지켜 고을 사람들을 보호한 현감 변협(1526~1590)이었다. 그 공로로 장흥부사로 승진하여 임지로 떠나면서 동헌에 한 그루의 곰솔을 심었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왜구를 막은 남다른 감회이거나 아니면 승진에 대한 기쁨의 증표였을까. 이때가 공의 나이 혈기왕성한 27세였다. 공이 심은 나무는 현재 해남군청 뜰에 우뚝 서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본관은 원주(原州) 호는 남호(南湖)이며 아버지는 중추부경력 계윤(季胤)이며, 어머니는 참판 최자반(崔子泮)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다.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555년(명종 10년)에 해남현감이 되었다.

이때 을묘왜변이 일어나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에 침범, 병사 원적(元績), 장흥부사 한온(韓蘊)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을 생포했다. 연이어 난포`마도`장흥부병영`강진현`가리포를 함락하고 해남으로 침입했는데, 공은 이를 격퇴한 공으로 장흥부사가 되었다.

또 이때 왜적의 포로가 되었던 명나라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명나라로부터 은과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1563년(명종 18년) 만포첨사를 지낸 뒤, 이듬해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보우가 제주도에 귀양 오자 조정의 명에 따라 그를 참살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전라우방어사가 되어 녹도`가리포의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공조판서 겸 도총관과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파주목사로 재직할 때 율곡 이이로부터 ‘주역계몽’(周易啓蒙)을 강론 받았으며, 천문`지리`산수에도 정통했다.

변방 10여 군현을 순시해 산천 도로의 형세를 조사하고 도표로 만들어 적침에 대비하였다. 또 천문을 관측해 변란을 예측하기도 했는데, 그가 죽은 지 2년 뒤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란 때 신립이 군사를 이끌고 문경새재로 떠날 때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본 선조가 변협을 양장(良將)이라 칭찬하며, 그가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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