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상주인 이요당 주이와 합천 호연정 은행나무
아트코리아 | 조회 639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상주인 이요당 주이와 합천 호연정 은행나무

후학 양성 위해 만든 정자에 심은 나무

 

본관지를 경북 상주로 하는 주씨(周氏)들의 집성촌이 본향이 아닌 경남 합천 율곡면 문림리에 있다는 사실이 퍽 흥미로웠다.

중국 주나라 난왕의 후손으로 786년(신라 원성왕 2년) 귀화한 그들이 본관을 상주로 한 것은 시조 주이가 상주 총관(摠管`군사를 지휘하는 직책)으로 재임한 후 그곳에 정착한 데 따른다고 한다.

그들이 외진 고을 합천에 자리 잡은 것은 도은(陶隱) 주유(周瑜`1347~1427)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1367년(공민왕 16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오늘날 국립대학 격인 국자감(國子監)에 근무하면서 유학진흥에 힘썼다.

야은 길재, 상촌 김자수와 함께 근무했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각기 고향인 선산과 안동으로 은거했다. 그러나 도은만은 상주가 너무 드러난 지역이라 은거하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부인 청주 한씨의 외조부 이계령(李桂齡)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상주주문은 여초 지주사를 역임한 주세봉(周世封)으로부터 한글학자 주시경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분은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을 세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다. 신재는 이곳에서 태어나 7세까지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함안 칠원으로 이사 갔다고 한다.

마을 이름 문림(文林)은 매우 특별한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는 ‘민갓’ 또는 ‘문갓’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중종(中宗)이 신재에게 출생지를 묻자 ‘민갓’이라 하였더니 ‘선비가 숲같이 많이 나라는 뜻으로 문림(文林)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곳 마을 앞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아름다운 정자 호연정(浩然亭`경남 유형문화재 제198호)이 있다. 조선 중기 학같이 고고하게 살다간 이요당 주이(周怡`1515~1564)가 예안현감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곳에는 이요당이 심은 큰 은행나무가 있다.

공은 아버지 주세귀(周世龜)와 어머니 창원 최씨(昌原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호 이요당(二樂堂)은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즉 ‘지혜 있는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한다’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정성으로 간호를 해 낫게 하자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특히 당숙(堂叔)인 주세붕은 공의 비범한 재능을 알고 ‘너야말로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1560년(명종 15년) 대과에 급제해 성균관 학정`전적, 이조`형조의 낭관, 춘추기주관, 도사 등 여러 벼슬을 거처 37세 때인 1551년(명종 6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황제 세종이 소나무분재를 보여주면서 시를 지으라고 하자 이렇게 지었다.

작은 모래 분에서 자란 반 척의 소나무/ 半尺沙盆半尺松

한 평생 풍상 무릅쓰고 용종하게 늙었네./風霜孤節老龍鐘

나는 아노라 저 소나무 하늘 높이 자라지 않는 뜻을/知渠不學干天長

사람이 곧으면 용납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驗得人間直不容

이 시는 올곧은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는 세태를 빗대어 쓴 것이다. 황제는 크게 칭찬하고 공을 일러 ‘직불용’(直不用) 선생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사신이 갈 때마다 그곳의 학자들이 공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공은 예안현감을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호연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아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퇴계가 ‘신재집’(愼齋集)을 교정하다가 문제가 있으면 제자를 시켜 “글 가운데 적당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예안공(禮安公`이요당을 말함)과 상의하라”하였다고 한다.

조목, 이정, 황준량 등과 교유했다. 1564년(명종 19년)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0세 한창 원숙해지는 나이였다. 저서로 ‘이요당선생문집’이 있고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비록 길지 않는 생애를 살았으나 심은 나무만은 4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외교관으로, 공직자로, 학자로, 다양한 삶을 살다간 공의 행적을 고려해 볼 때 보다 품격이 높은 문화재로 지정함이 마땅할 것 같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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