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클로즈업人 사람속으로…] 공무원에서 향토사학자로…달구벌 얼찾는 모임 대표 이정웅
아트코리아 | 조회 836

클로즈업人 사람속으로…] 공무원에서 향토사학자로…달구벌 얼찾는 모임 대표 이정웅

 

동산병원 옆 선교사 사택 계단길…"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만들자"
"대구는 승승장구하는 도시…절대 기 죽지마라"

 




어, 대구가 언제 이렇게 푸릇해졌지?

그 연유를 파고 드니 거기에 이정웅 달구벌 얼찾는 모임 대표(64·전 대구시 녹지과장)가 있었다. 문희갑 전 시장과 핫라인을 형성한 그는 대구수목원은 물론 콘크리트 투성이던 대구 도심에 '녹색 융단'을 깔았다. 1996~2002년, 7년간 진행된 대구판 새마을 운동으로 불리는 '푸른 대구 가꾸기 운동', 무려 654만여 그루의 나무가 도심 곳곳에 투하됐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하절기 대구 도심 평균 기온이 1~2℃ 낮아졌고 잿빛 도시였던 대구가 시민 1인당 녹지율 전국 최고란 영광도 얻었다.

2002년 5월3일 불가능해 보였던 대구수목원이 우여곡절 끝에 개원하던 날, 이 대표는 속으로 흐느껴 울었다. 각종 민원 등에 골병들었지만 끝내 쓰레기 매립장에서 연꽃 같은 수목원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삭막한 신천동로 벽에 담쟁이 덩굴과 장미를 심은 것도 그였다.

이 대표는 처음부터 거창한 일을 겨누지도 않았다. 충실히 공직을 수행하다보니 문득 식물 전문가가 됐고 숨은 대구역사 궁금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 날 향토사학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2004년 후진하는 달구벌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달구벌 얼찾는 모임'을 만들었다. 대구 시민의 얼을 가꿔보자는 취지다. 외적 녹화사업에서 벗어나 '내적 녹화사업'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2003년 5월 정년 퇴직한 그는 요즘 매일 금호강 둔치로 나가 생태공원 조성 자문역을 맡고 있다.

대구시 서구 내당동 삼익뉴타운 자택은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선비의 사랑채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른쪽 벽에 '새가 오게 하려면 나무를 심어야 된다'는 그의 좌우명 같은 액자 속 문구가 강한 울림을 준다. 거실엔 별다른 장식물이 없고 책만 푸짐하게 쌓여있었다. 대구시사, 경상도 지리지, 영남인물고, 대구향교지, 지명유래총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참고도서가 묵향을 풍긴다.

부인은 내방객을 위해 예전 종부처럼 다과를 다소곳하게 내놓았다. 그동안 대구 관련 6권의 책을 발간했다. 2004년에는 '계간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구 정신의 본질은 뭘까. 그가 아니었다면 사각지대로 방치됐을 뻔한 향토사에 대한 귀한 얘기를 챙겨봤다.

 

-공무원에서 향토사학자로 변신한 이유는.

"내 삶의 출발은 지극히 평범했다. 상주 농잠고를 졸업한 뒤 대구시 산림공무원이 돼 처음 동촌출장소에서 일했다. 84년부터 효율적으로 산불 진화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지형을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헬기가 출동하면 가까운 못이 어디 있는 지 미리 파악해둬야 빨리 불을 끌 수 있을 게 아닌가. 그 전엔 솔직히 대구가 어떤 도시인지 전혀 몰랐다. 산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팔공산과 비슬산의 각종 불교유적 등을 접할 수 있었다. 산을 알수록 대구 사랑하는 맘도 더 생기더라. 그런데 정작 시민들은 대구의 진면목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씩 얘기해주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90년대초 팔공산에 관한 책을 처음 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역에 팔공산을 인문지리학적으로 터치한 저서는 없었던 것 같다.

"87년 팔공산관리소 계장으로 있을 때 팔공산 모든 계곡을 다 답사해봤다. 그걸 토대로 93년 '팔공산을 아십니까'란 첫 저서를 펴낼 수 있었다. 지인들도 등잔 밑이 어두웠다면서 팔공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건 광주 무등산의 경우 관련 모임이 100여개나 되는데 팔공산을 위하는 모임은 전무했다."

-팔공산 사랑하기 1탄이 바로 책 내기였던 것 같다. 팔공산은 도대체 어떤 산인가. 

"불교 성지다. 석굴암보다 1세기 앞선 석굴암(군위 제2 석굴암)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교종단 조계종을 중흥한 보조국사 지눌이 이 산에서 고려불교 개혁을 주도했다. 한 산에 두 개의 본사(제9교구본사 동화사와 제10교구본사 은해사)가 있고, 특히 입시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신도들이 찾는 갓바위가 있는 곳이다. 호국의 산이기도 하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이 이 산에서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했고, 고려 명장 신숭겸이 태조 왕건을 구해냈고, 임란 시 의병과 사명대사가 활동했다. 이밖에 은해사 거조암 등 국보가 2점이 있고, 동화사는 동아시아 10대 관광지로 선정됐다." 


-대구를 사랑하는 12가지 이유를 자주 거론하던데. 

"대구는 승승장구하는 도시다. 8세기 한 현에 불과했던 대구가 군-도호부-시-직할시-광역시로 발전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적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민족시인 이상화, 고월 이장희, 소설가 현진건, 음악가 박태준과 현제명, 화가 이인성 등의 면면만 봐도 알 듯이 대구는 근대 예술의 발상지였다. 천연 기념물 1호(도동 측백 수림), 국내 가장 오래된 토성(사적 62호 달성)이 있고, 국내 최고 밀집 고분이 있는 불로동 고분군, 8만대장경보다 150년 앞선 초조 대장경을 팔공산 부인사에 모셨고, 가난한 서민을 위해 전국에서 맨 먼저 정부가 아닌 민간 주도로 사창(社倉)을 조직한 게 대구다. 절대 기 죽지마라." 


-달구벌 얼찾는 모임은 어떤 계기로 결성하게 됐는가. 

"대구 중앙로 지하역 방화사건을 계기로 대구는 왜 이렇게 자주 큰 불이 나는가, 안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대구의 주맥은 어딘가를 고민하다가 2004년 달구벌 얼찾기 모임을 결성했다. 지금 30여명이 활동한다. 그 1차 사업으로 중구 제일중 교정에 있던 연귀산 거북바위 방향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토대로 기존 동-서에서 남-북 방향으로 바로잡았다. 이때 뜻있는 분들이 격려를 많이 해줬다. 이에 앞서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거북을 대구의 마스코트로 하자는 주장도 했다. 이밖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동시에 통섭했고 말년에 대구에 기거했던 한강 정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요즘 택지조성중인 북구 사수동에 한강 공원(지난 10월 설계 완성)이 들어서도록 했다. 또한 화원동산 꼭대기에 상화대 십경비를 세우고 팔공산 비로봉 쇠말뚝도 2개를 뽑았다. 일제 때 지적도를 검토해 서구청 앞 사직단 위치도 알아냈다."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만들자고 자주 주창하는데 어디가 적지인가. 

"요즘 대구 도심을 새롭게 리모델링하고 있다. 이때 대구만의 색깔을 가진 관광명소형 언덕을 하나 만들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언덕은 동산병원 옆 선교사 사택으로 올라가는 계단길과 봉산문화거리에서 제일중 가는 길이 딱이다. 실제 프랑스 몽마르트르와 지형도 비슷하고 대구 예술의 새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박태준이 작곡한 '동무생각'이란 가곡에 나오는 '청라언덕'이란 바로 담쟁이 덩굴이 많은 동산(동산선교박물관이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거기에도 기념비를 세울 계획이다. 그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요즘은 거의 죽은 길이지만 예전에는 계성학교 가던 학생들이 등교하던 주 통로며, 현제명이 작곡한 '희망의 나라로'의 악상을 준 곳이기도 하다." 


- 대구는 원래 보수 도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구정신의 본질은 뭔가. 

"새마을사업을 일으켜 누대로 내려오던 가난을 떨치게 했고 민족중흥의 주도세력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는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골통의 본거지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실제로 많은 시민들이 실체도 없는 이 말에 동조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구는 여느 도시와 달리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정신 중 가장 빛난 대목인 것 같다. 

"공감한다. 대구에서 민간주도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타올랐으며, 기생들까지 패물 모으기에 동참, 여성운동의 효시가 됐다. 무력이 아닌 금연을 통해 전개된 이 평화운동은 대구정신의 구현이다. 아쉬운 점은 국채보상운동을 모의했던 대한광문사 건물이 불과 몇 년 전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주역의 한 사람인 서상돈 선생의 생가도 미리 복원하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 고려·조선 때도 도저한 대구정신이 분출했다. 

"조선조의 두릉두씨(杜陵杜氏·임진왜란 때 당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였던 두사충)와 사성(賜姓)인 김해김씨(임진왜란 때 귀화해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살았던 김충선 장군)처럼 중국·일본에서 귀화한 이민족(異民族)과도 잘 어울려 살았다. 16세기 영남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와 서부 경남 남명학파로 대립하고 있을 때도 대구에선 양 학파가 공존했다." 


-역대 선거 때도 야도(野都)로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3대 대통령 선거 출마자인 진보 성향의 조봉암 대통령 후보에게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그때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 시절이라 보복이 두려워 어느 누구도 드러내 놓고 반대를 못했다. 그런데 청년학생들이 2·28 의거를 감행, 4·19혁명의 도화선 구실을 했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을 몰락시켰다. 또한 전라도 출신 조재천을 연속 2회, 충청도 출신 조병옥을 국회에 보내는 등 지역감정보다 인물 위주로 선택했다. " 


-그동안 여러 저서를 통해 대구향토사 중 잘못된 대목을 많이 지적한 것 같은데. 

"신천은 대구 판관 이서가 만든 인공하천이 아니고 대구분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하천으로 본다. 대구현과 수성현 사이에 있어 샛내(샛강)라고 부르던 것을 샛 즉 '사이(間)'를 새(新)로 한자화한 것이다. 성주와 경기도 의정부 등에 있는 신천도 모두 인공하천이 아니라고 본다. 또 서거정의 대구 10경 중 삿갓바위 즉 입암(笠巖)위치가 현재 건들바위 입암(立巖)이 아니다. 이밖에 중국에서 귀화한 풍수지리가 두사충이 고산지역 성산으로 묘 터를 보러 가다가 담이 끊어져 생긴 고개가 담티가 아니고 고산과 대구의 경계가 담(墻)과 같이 높이 둘러쳐져 있다는 의미의 '장현(墻峴·대동여지도)'에서 유래됐다고 믿는다." 


내년에는 존재가 확인된 팔공산 정상부 천제단을 둘러싼 철조망을 걷어내고 '대구혼'을 고양시킬 수 있는 명소로 만들 수 있도록 군부대와 대구시에 협조요청을 보낼 계획이란다. 그래도 기존 사학자들은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는다. 그가 정식 사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정작 자신들이 앞장서 해야 될 일을 묵묵히 대신해주는 재야사학자를 푸대접하는 관행은 빨리 사라져야 할 것 같은데…. 

그는 짬이 나면 손기정이 받은 월계수(서울 정동고교 교정 내) 등 유명인과 얽힌 나무를 순례하고 있다. 조만간 아내와 함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모델이 된 제주도 대정향교에 있는 팽나무와 해송을 구경하러 갈 예정이다. 그의 속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다음 블로그 '나무이야기 꽃 이야기'를 클릭해보라. 


#이정웅 달구벌 얼찾는 모임 대표 

1945년 의성에서 출생. 상주농잠고를 졸업한 뒤 대구시 산림공무원이 됐고 산림·녹지계장을 거쳐 대구시 임업시험장장·녹지과장을 역임하고 2003년 정년퇴임했다. 임업시험장장일 때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쓰레기매립장이었던 곳을 대구수목원으로 바꿔놓았다. '푸른대구만들기' 프로젝트 실무책임자로 활동 중 대구향토사 바로잡기 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퇴임후 2004년 '달구벌 얼찾는 모임'을 만들어 동-서 방향에 놓였던 제일중 거북바위를 남-북방향으로 위치를 바로잡는 등 대구정신 고양운동을 전개중이다. 

2004년 계간 '문학시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그는 그동안 시집 '며느리 밥풀꽃'(92년), '팔공산을 아십니까'(93년),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95년), '아름다운 야생화'(99년),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2000년), '나무들이 들려주는 푸른대구이야기'(2006년)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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