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영화감독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와 사문진의 팽나무
아트코리아 | 조회 649

오랜 역사를 간직한 화원의 사문진(沙門津)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주변을 깨끗이 치우고 아주 단출하게 주막을 꾸며 놓았고, 낙동강 정비 사업으로 강물이 많아졌으며 강폭이 바다같이 넓어 옛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곳이고, 조선 전기에는 왜물고(倭物庫)를 설치해 대일무역 중심지가 되었으며, 중기에는 명소 상화대를 찾는 시인 묵객들로 시문학이 꽃핀 장소이고, 후기에는 낙동강 수운을 이용해 쌀, 소금, 생선, 석유 등 생필품이 유통되던 물류는 물론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악기 피아노가 들어온 곳이자 일제강점기에는 나운규의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 영화사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임자 없는 나룻배’의 촬영지였다.

사문진은 모래(沙)가 있는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문(門)과 같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라는 뜻에서 사문(沙門)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모래톱이 있는 전국의 많은 포구 중에서 사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없는 것을 볼 때 일연 스님이 주석했던 인흥사를 드나들든 사부대중들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자 없는 나룻배’는 향토 출신 이규환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었기에 더 뜻 깊은 곳이라 하겠다.

이 감독은 1904년 중구 인교동에서 아버지 이근수와 어머니 장옥진 여사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찰리 채플린의 작품을 보며 영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의 휘문학교를 다니다가 대구로 내려와 계성학교에 편입했다.

4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경남 밀양으로 피신해 2년간 숨어 살았다.

다시 대구로 돌아온 그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화예술연구소에서 6개월 동안 기초수련을 마친 다음 돌아왔다.

1927년 미국으로 가기 위하여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상해로 떠났다가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경도의 신흥키네마촬영소에 입소, 몇 달 동안의 수련 끝에 조감독으로 3년 가까이 연출수업을 닦았다.

1932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첫 작품 ‘임자 없는 나룻배’를 발표함으로써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홍수로 농토를 잃은 수삼이 아내와 함께 서울로 가서 인력거를 끈다. 그러나 출산을 앞둔 아내의 입원비를 마련하고자 물건을 훔치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 한편,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는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해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수삼은 출옥 후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나룻배 사공이 되었다.

10년 후,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생기고 수삼은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철교 건설기사가 딸을 겁탈하려 하자, 격분한 수삼은 기사와 사투를 벌인다. 이때 넘어진 등잔불이 번져 딸이 죽고, 수삼 역시 마주 오는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강 아래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만 슬프게 떠다닌다’ 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정신과 리얼리즘 정신을 뒷받침한 우리 영화의 대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밝아가는 인생’ ‘바다여 말하라’ 등 여러 편을 만들었으나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거부하고 영화계를 등지게 된다. 그 후 강제 징용되어 중노동을 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돌아온 어머니’ 등 광복의 감격을 영상화한 것과 ‘춘향전(1950)’`’심청전(1956)’ ‘평양기생 계월향(1962)’·’상처받은 여인(1963)’ 등의 작품을 계속 연출했다. 그러나 1962년 ‘남사당’을 마지막으로 1982년 작고하니 향년 78세였다.

그는 일생 단순한 오락이나 상업주의적인 영화의 테두리를 벗어나 리얼리즘 영화를 우리 영화계에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했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임자 없는 나룻배’를 촬영하기 위해 세트장을 만들었던 사문진에는 최근 달성군에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촬영지’라는 표석(標石)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행히 그의 영화제작 과정을 지켜보고 어쩌면 작품에 등장하는 나룻배를 매었음 직한, 그래서 포구(浦口)나무라고도 불리는 큰 팽나무 한 그루가 세찬 강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다. 이 나무야말로 한국의 대표 영화감독 이규환을 기억하지 않을까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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