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북대사대부설중·고의 수양버들 - 2013.11.28
아트코리아 | 조회 1,574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북대사대부설중·고의 수양버들
식민지 설움과 배고픔 잊으려 나팔 불었던 곳

 


특히 민족차별을 뼈저리게 느끼며 교육을 받았던 경북대사대부설중`고, 결혼식장이었던 계산성당, 군인으로 몸담았던 무열대, 동지들과 어울려 다니며 혁명을 모의했던 요정, 청수원 등은 그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인간 박정희에게 대구의 어느 한 곳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한 나무와 맺은 특별한 인연도 빼 놓을 수 없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15세의 소년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정원 100명(한국인 90명`일본인 10명)인데 총 응시자는 1천70명이었다.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던 가족들은 내심 진학을 포기했으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담임과 교장 선생이 설득하여 마지못해 응시한 것이 합격했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 구미보통학교에서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그가 처음이어서 학교는 물론 구미지역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여 장래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입학식과 함께 깨지고 말았다. 모두가 천황 폐하의 충실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교장의 훈시가 그를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일본인 상급생에게 경례도 하지 않았고, 사진첩에도 단기(檀紀)를 사용하는 등 말썽을 피우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사범은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답게 민족의식도 강했다. 사회주의자 현준혁 선생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학생들의 문맹퇴치운동을 격려했고, 광주학생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배일사상을 강조하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37명이 구속되고 9명이 기소되는 이른 바 ‘교유 및 생도비밀결사사건’을 주도했다.

이런 분위기는 박정희 학생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결석이 잦고, 학습 의욕이 떨어졌다. 그는 정규과목 공부보다 고전, 역사, 소설, 전기 등 다양한 교양서적들에 심취했다. 훗날 생각이 깊고, 감정이 섬세한 이유는 바로 이런 많은 양의 독서에서 길러졌다고 한다. 동기생으로 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조증출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학교생활에 대해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했다. 박정희의 인품은 기숙사생활을 통해 배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체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정신을 도야하게 되었고, 소아를 대의적 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소지를 함양하였다’라고 증언했다.

졸업할 때 성적은 좋지 못했다.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과 가난한 집안형편이 겹치면서 의기가 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난했던 그는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기숙사로 달려가 즐겨 부르던 나팔을 가지고 밖으로 나와 학교 옆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수양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가져간 나팔을 힘껏 불며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고 서러움을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그때 뼈저린 경험이 훗날 이 땅에 가난을 몰아내는 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설중`고 교정에는 그가 나팔을 불었던 수양버들 2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그대로 남아있고 다른 한 그루는 교사(校舍)를 새로 지으면서 정문 입구로 옮겨 놓았다.

학교를 찾아간 날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풍요에 넘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이 아이들이 교정에 서 있는 저 나무가 민족중흥의 지도자이자 새마을운동을 통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국민소득을 2만달러까지 끌어 올리고,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선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러움이 깃든 나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