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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옥산인 계동 전경창과 파동 무동재 팽나무 - 2013.11.14
아트코리아 | 조회 1,506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옥산인 계동 전경창과 파동 무동재 팽나무
대구에 퇴계학 전한 계동 선생 업적 알려주듯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문화관광해설사’ 등 이름은 약간 차이가 있으나 많은 향토사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 역사 교육이 중앙정치사 중심으로 흘러 왔기 때문에 지역사가 빠져 있고, 이를 전공하는 학자도 별로 없는 실정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비전공자이다 보니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애향심이 앞선 나머지 사실을 왜곡하는 사례도 많다. 이런 점은 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퇴계학의 대구 전래(傳來) 과정이다. 대구는 지리적으로 도산과 멀어 직계 제자가 없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계동 전경창 선생의 연보 작성을 위한 시론, 구본욱’을 보고 지금까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에 의하면 당시 대구 사람으로 ‘도산급문제현록’에 등재된 사람은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추월헌(秋月軒) 채응룡(蔡應龍`1530~1574) 두 분이었다. 그러나 추월헌은 본디 대구 사람이기는 하되 아버지 채증이 을사사화로 벼슬(예조정랑)에서 물러나 안동 임하에 정착, 그곳에서 출생해 도산에게 수학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시 대구로 옮겨 살았다고 하니 실제 대구 출신은 계동뿐이라고 할 수 있다.

계동 선생은 본관이 옥산으로 1555년(명종 10년) 진사시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1564년(명종 19년) 매암 이숙량 등과 연경서원 창건을 주도하고, 1566(명종 21년) 35세 때에 모당(慕堂) 손처눌과 태암(苔巖) 이주가 공에게 배움을 청했다.

이때 아호를 계동, 즉 신천의 동쪽에 기거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또한 낙재 서사원과 괴헌 곽재겸이 찾아오자 각기 ‘심경’과 ‘근사록’을 주었다.

1571년(선조 4년) 연정 서형, 남간 서식 형제와 송담 채응린이 청하여 청하 내연산을 유람했다. ‘유산록’(遊山錄)을 남겼으나 임란 때 유실되었다고 한다. 1572년(선조 5년) 형 응창이 문과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73년(선조 6년) 공 역시 문과에 급제했다. 1575년(선조 8년) 벼슬길에 나아가 경주, 진주교수를 시작으로 성균관 학록, 정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대교, 봉교를 거처 1581년 병조좌랑(정6품)에 올랐다. 이때 일반사신이 겸하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업무를 전담사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자 이를 선조가 받아들여 성사시켰다.

종계변무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이라고 명나라에 잘못 알려져 조선왕실의 정통성이 훼손된 사건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개국 후 200여 년간 수차례 사신을 보내 시정을 요구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후 공은 영변 통판을 역임하고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사헌부 지평, 호조정랑(정5품)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1585년(선조 18년) 54세에 한양에서 돌아가셨다.

1590년(선조 23년) 종계변무가 공의 주장으로 시정되자 원종공신으로 녹훈되고 홍문관 응교(정4품)로 증직되었으며 1635년(인조 13년) 연경서원 방묘(榜廟)에 봉안되었다. 달성군 하빈의 하목정 주인 낙포 이종문이 공의 사위다.

조선 후기 대구의 거유였던 임제(臨霽) 서찬규(徐贊奎`1825~1905)는 계동 선생을 일러 ‘대구 지역의 유학은 계동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라고 했다. 그 후 공의 상당수 제자들이 만년에 북구 사수에 정착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의 문하에 흡수되면서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저서로 ‘계동집’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계동은 정구 선생에 의해 소위 한강학단(寒岡學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손처눌이나 서사원 등을 통해 대구 유학에 디딤돌을 놓았다. 한때 일파이무(一巴二無), 대구에 살기 좋기는 파동이 제일이고, 무태가 다음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주거지로 각광받았던 파동 서원골에는 공을 기리는 무동재(武洞齋)가 세워졌다. 그곳 아름드리 팽나무 한 그루가 공이 퇴계학을 대구에 전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 가고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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