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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고려 승상 유청신 선생과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 2013.10.10
아트코리아 | 조회 1,488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고려 승상 유청신 선생과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원나라 갔다 돌아올 때 가져온 묘목 심어

 


천안은 꼭 가봐야 할 곳이었다. 애틋하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거나,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친구가 있어서가 아니다. 15년여 전 ‘천안삼거리’ 복원공사에 필요하다며 가져간 수양버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처럼 유청신 선생이 가져온 호두나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구시청에서는 수양버들을 키우고 있었다. 민요나 유행가에 등장하는 친숙한 나무이나 솜털 때문에 일어나는 민원으로 많은 나무를 베어 내다가 생각해낸 것이 솜털이 날리지 않는 수(雄)나무 양묘였다. 그런데 천안시가 어떻게 알고 필요하다며 분양을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통해 거듭 요청해와 150그루를 보냈다. 천안삼거리를 복원하는 데 심을 것이라고 했다. 흥타령의 발상지이자 삼남(三南)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입성하기 위해 숱한 애환을 남긴 곳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또한 한 선각자의 특별한 나무 사랑으로 오늘날 국민 간식으로 자리매김된 ‘천안호두과자’로 지역의 가치를 높였고, 주민소득 증대에 기여한 우리나라 최고령의 호두나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딸은 물론 며느리도 동행했다. 찾아간 광덕사 입구에는 ‘고려 승상 영밀공 유청신 공덕비’와 ‘호두 전래 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나무가 있는 태화산 광덕사는 ‘호서제일선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명찰임을 실감했다.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보물 6점, 천연기념물 1점 등 승보(僧寶)도 있었다.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는 보화루 오른쪽에 있었다. 지상 0.6m 정도에서 2개의 가지로 갈라졌다가 다시 3가지로 뻗어나갔다. 지난봄 극심한 추위와 가뭄에도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많이 열렸다.

나무 앞에는 ‘유청신 선생 호두나무 시식지’라는 표석이 서 있었다. 1290년(고려 충렬왕 16년) 9월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을 모시고 돌아올 때 어린나무와 열매를 가지고 와서 묘목은 광덕사에 심고, 호두는 집에 파종했는데 그때 묘목이 자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올해로 수령이 740여 년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안내판에는 400년이라고 해 300여 년의 오차가 있다.

이런 사례는 전국적으로 몇 곳 있는데 맹아가 자란 경우에는 심은 연도를 기준으로 수령을 산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모수의 유전형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생물학적으로 같은 개체이기 때문이다.

영밀공 유청신(柳淸臣`?~1329)은 고흥의 고이부곡(高伊部曲) 사람으로 선대가 그곳의 관리였다고 한다.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정6품, 무관)이 되었다. 당시 부곡 출신은 정5품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그런 제약을 뛰어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면서 정쟁에 휘말려 원나라에 압송되고 최유엄, 홍선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원에 억류되었던 충선왕이 원의 무종(武宗)을 옹립한 공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공 또한 중용되고 비(庇) 대신에 청신(淸臣)이라는 이름을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다.

1310년(충선왕 2년)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소환될 때 따라가 그곳에서 돌아갔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호두나무는 손자 장(莊)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여말 나라가 혼란하자 아버지와 함께 낙향하여 할아버지가 가져온 호두나무 기르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유관순(1902~1920) 열사는 공의 후손이다. 병천에 가서 또 다른 천안의 명물인 순대로 점심을 먹고 독립기념관을 관람했다.

명소 천안삼거리공원을 거닐며 양반의 고장 충청도로 장가간(수나무이니까) 수양버들과 15년 만에 해후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혹자는 그곳에 웬 수양버들을 심었느냐 하겠지만 당시 생산해 놓은 능수버들의 묘목이 전국 어디에도 없었고, 또한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은 이름만 다를 뿐 오래 세월을 거치면서 서로 교잡되어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영밀공 유청신 선생의 아름다운 마음은 천안은 물론 나라 사람 모두에게 오래 기억될 미담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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