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노거수와 사람들] 관찰사 석현 이용익과 달성공원 참느릅나무
아트코리아 | 조회 1,172

[노거수와 사람들] 관찰사 석현 이용익과 달성공원 참느릅나무
훌륭한 뜻 기려 ‘관찰사 이용익 나무’ 어떨까

 


대구에 최초로 거주한 일본인은 오카야마현(岡山縣)에서 온 히자쓰키(膝付)와 무로(室)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대구부사> 1893년(고종 30년), 9월 대구에 정착하여 남문 안에 자리 잡고 의약품과 잡화를 팔았다고 한다.  

그 후 경부선 철도 개통을 전후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와 1904년(고종 41년)에는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대구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다고 한다.

주로 철도 건설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이었지만 생필품을 파는 상인이나 투기꾼, 여관, 요리점을 경영하며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늘어나자 그들은 ‘대구일본동포회’를 조직하여 대구 제일의 경승지 달성에 천황을 기리는 요배전(遙拜殿)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관찰사 이용익(李容翊`1854~ 1907)은 국산품을 장려한다며 달성 서씨들로 하여금 뽕나무 밭을 조성하도록 하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또한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 소유의 토지를 사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서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따라서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로서는 이 관찰사가 눈엣가시였다.  

급기야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 앞에서 차별이 부당하다며 시정을 요구하는 집단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수비대장 히타카(日高才二) 대위와 친일파 군수 박중양의 위협적인 중재(?)로 구속된 자를 석방하였음은 물론 이 관찰사는 황실의 회계심사국장으로 전보되고 말았다.

아호가 석현(石峴)인 이용익은 1854년(철종 5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아버지는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였다. 선대는 무과 출신으로 한미한 집안이었으나 금광에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監役)을 제수 받았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함경남도 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 업무를 총괄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탁지부대신(오늘날 기획재정부장관)으로서 조선의 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강력히 반대했다.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일본으로 압송해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여 보성중`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설립했다. 이후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했으나 일본의 공작에 의해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출국하여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 열강에 알리려고 했다.

프랑스로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에서 일본 관헌에게 잡혔고 조정에서는 비밀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그를 공직에서 박탈해 버렸다. 1907년(순종 1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을 얻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명했다. 왕권강화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 등 열강의 보장하에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우국지사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공은 1905년 2월 17일부터 5월 18일까지 3개월여 경북도관찰사로 재임했다. 그 와중에도 대구의 상징이자 대구시민의 자존심인 달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훌륭한 목민관의 자세를 보였다. 공의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공원 내 잔디광장의 오래 된 참느릅나무를 ‘관찰사 이용익 나무’라고 하여 그를 기렸으면 한다. 참느릅나무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부지했던 시절 어린잎을 식량대용으로 먹었던 나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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