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5    업데이트: 18-04-11 15:50

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고성인 남지언과 영동 상촌리 느티나무 - 2013년 09월 12일 -
아트코리아 | 조회 1,046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고성인 남지언과 영동 상촌리 느티나무
나라에 큰 변고 있을 때 가지 하나씩 부러져

 


카페(나무를 찾아서 나를 찾아서) 회원들과 함께 정기답사로 충북 영동군을 찾았다. 첫 방문은 미리 선정해둔 영국사 은행나무였다. 1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세가 강건했다.

통일신라 후기에 지어졌다는 영국사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중창주인 원각국사비(보물 제534)를 비롯해 많은 성보문화재가 있다. 이어 심천면 가호리로 향했다. 수령이 300년이나 되었다는 큰 떡갈나무에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것은 떡갈나무가 아니라 갈참나무였다. 보호수로 지정할 때 정확하게 검증하지 못한 결과로 생각된다.

다시 상촌면의 그림 같은 소나무를 보고, 발길을 옮겨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를 찾아 수산마을에 도착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산나무로 삼괴당 남지언 선생이 애완했고,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가지가 하나씩 부러져 대동아전쟁, 6`25전쟁 때 각각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또 1991년 동민들이 세운 유래비에는 ‘동으로 황학산을 바라보며 서로 용암산 품에 안겨 있는 이 마을은 울창한 숲 우거진 산속에 묻혀 있어 수매(藪梅)마을이라 불렸고 그 후 수산동(壽山洞)이라 했다. 고성인 남세지(南世智)공의 어린 때에 모친 이천 서씨가 서울로부터 이곳에 정착할 즈음 불과 몇 가구로 마을형성의 시작이라 하니 1505년(연산군 11)이다. 후에 선산 곽씨, 은진 송씨, 안동 권씨, 영산(永山) 김씨가 옮겨와 터를 닦음으로써 마을이 번성해 왔다. 조선 중종에서 명종 조에 이르기까지 남인(南寅), 남지언(南知言), 남경효(南景孝) 3대에 걸쳐 효행이 극진하여 3효전이 전래되고 있으며 1830년(순조 30년)에 열녀로 정려된 남상익의 배, 인천 채씨가 병사한 남편을 따라 순절한 열행비가 있고, 비록 비문은 없어도 남이현의 배, 울산 박씨, 권중각의 배, 남양 홍씨는 혼례 직후 남편을 여의었으나 수절하고 시부모를 종신토록 극진히 모시여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했으니 우리의 정통 여인상이라 하리라. 근년에 이르러 행하는 윤리포상에 효부, 열행 자가 많이 배출되는바 이로써 크게 자랑할 만하다. 수령을 헤아리기 어려운 마을 앞 괴목은 무언의 역사를 간직하고 변과 화를 예고해 주는 마을 수호목으로 매년 음력 정월 초삼일 자정을 기하여 동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78년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삼괴당과 세심정은 후예 교육 유허로서 후세에 전해지리라. 동민은 외유내강하고 근검절약하여 1927년 동재 임야 146정보를 확보 보전하고 있다. 효와 정열이 인륜과 행실의 근본임을 선대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이를 후세에 전하고 자랑이 되게 하고자 이 비를 세우다’라고 했다.

충청도가 양반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늘에 쉬고 있는 한 촌로에게 내력을 물었더니 삼괴당 남지언(1507~?) 선생이 3그루를 심었는데 2그루는 죽고 남은 1그루라고 했다.

선생은 본관이 고성으로 남인(南寅)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인 김시창에게 배워 향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효행으로 천거되어 김천찰방으로 나아갔다가 사임하고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공이 후학을 양성했던 삼괴당은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02년(순조 2년)에 중수하였으며 한원진의 ‘삼괴당기’, 송환기의 ‘삼괴당중수기’와 윤봉구가 쓴 당호 등이 있었다. 아버지 남인과 아들 남경효(南景孝) 3대의 효행으로 정려되어 삼효각을 세웠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촌로의 증언과 아호를 삼괴(三槐)로 삼은 것을 볼 때 느티나무는 남지언 선생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반야사의 500년 된 배롱나무를 보고 읍내에서 올뱅이(다슬기의 영동 사투리)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귀로에 올랐다.

입향조 남세지공이 서울을 떠나 이곳 깊은 산골마을로 은거한 것은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 폐비사건에 관련된 신하들을 학살했던 갑자사화의 화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 2013년 09월 12일 -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