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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와사람들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남도 제일의 배롱나무 원림 담양 명옥헌 - 2013년 08월 22일 -
아트코리아 | 조회 1,079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남도 제일의 배롱나무 원림 담양 명옥헌


물 흐르는 소리가 옥 같아…호남의 전형적 정자

 


예상은 적중했다. 담양 명옥헌 원림(명승 제58호)은 8월 초순에 가야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88고속도로를 달려서 3시간 만에 닿으니 기대했던 배롱나무꽃이 만발했다. 몇 번 다녀간 곳이기는 했으나 개화시기를 맞추지 못해 번번이 실망했었는데 이번만은 대성공이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중기의 문신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곳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우수해 일찍 서당에 입학하여 세상 살아가는 도리와 예의범절을 깨우치고 16세에 계곡 김복흥(1546~1604)에게 글을 배워 1601년(선조 34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부친상을 당하자 몸이 쇠약한데도 3년 동안 시묘를 지성으로 행하여 주민 모두가 감탄했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주위에 명성이 높았다.

1623년(인조 1년)에 마침내 대과에 급제,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민첩하고 정확하게 요점을 잘 정리하여 임금과 동료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이어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을 제수받았다. 검열은 품계는 비록 낮아도 왕을 가까운 자리에서 보필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신망이 두터운 관리에게만 주어지는 벼슬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연두에 걸려 그해 41세로 타계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검열 오희도가 천연두를 앓다가 경저(京邸`서울에 있는 집)에서 객사하였다. 상이 듣고 관판(棺板`널)을 지급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도승지에 증직되고 저서로 ‘명곡유고’가 있다.

이후 이곳은 공의 4남 장계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물려받아 장계정을 짓고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鄭弘溟`1592~1650)에게 글을 배워 1639년(인조 17년) 진사`사마 양과에 합격했다.

1650년(효종 1년) 태학에 들어가 이듬해 정시(庭試)에 응시했으나 요건이 미흡하다 하여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아버지가 검열을 지냈고 본인이 진사`사마 양과에 합격한 사실을 볼 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기예에도 능해 거문고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를 행했다. 1655년(효종 6년) 37세에 요절했으며 저서로 ‘장계유고’를 남겼다.

장계공 이후에도 이 원림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경영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아끼는 제자 오기석(吳棋錫`1651~1702)을 찾아와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호 명옥은 ‘시냇물이 흘러 한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 연못으로 흘러가며 내는 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것만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어 오기석의 손자 오대경(吳大經`1689~1761)이 못을 파고 소나무와 배롱나무(백일홍 또는 자미화라고도 함)를 심었다.

못은 네모지게 파고, 가운데 둥근 섬을 두어 천원지방의 전통사상을 담아 꾸몄다.

이상이 첫 주인 오희도로부터 원림을 완성한 마지막 오대경에 이르기까지 140여 년 동안의 남도 명소 명옥헌의 전말이다. 그러나 이 소중한 문화재 역시 당국의 설명문과 현지에 세워둔 안내판의 내용이 달라 혼란스럽다. 즉 담양군청의 자료에는 명옥헌은 오이정이 지었고,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배롱나무도 오이정이 심었다고 했으나 현지 안내판에는 오대경이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또 하나 볼거리는 같은 마을에 있는 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기 전에 지지 세력을 모으기 위해 재야의 이름난 선비 명곡 오희도를 찾았다. 그때 타고 온 말을 이 은행나무에 매어 놓았다.

그러나 명곡은 노모를 모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이 나무를 인조가 말을 맨 나무라고 하여 맬 계(繫), 말 마(馬), 은행나무 행(杏)자를 써서 계마행(繫馬杏)이라고도 한다는 비화가 숨어 있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로 가운데 방을 두고 ㅁ자 마루를 놓은 호남지방 정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 2013년 08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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