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    업데이트: 18-06-20 17:51

언론

■ 연경동 ‘광해군태실’ 깨진 채 방치…당시 유림의 테러?
아트코리아 | 조회 756

유일하게 대구에 묻은 조선 15대 王의 ‘태’

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스토리 엮어 홍보를
 

이정웅 대구지오 자문위원이 지난 22일 대구시 북구 연경동 광해군태실을 찾아 깨지고 부서진 태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다.

조선조 15대 왕 광해군(1575∼1641)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한켠에선 그를 무능하고 비열한 폭군으로 내몰고, 다른 한켠에선 유능했지만 불우한 군주로 받들고 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돼 국난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교로 명·청 교체의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했다. 또한 대동법을 실시해 공납제도의 폐해를 개선했다. 광해군은 대북파를 전면에 내세워 개혁을 하다 서인세력의 반정으로 폐위됐다. 

하지만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폐륜을 저질렀으며, 궁궐을 중수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여하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을 노역으로 내몰았다.

광해군은 대구와 깊은 인연이 있다.

조선왕조 500여년간 재위한 27명의 왕 가운데 대구에 태(胎)를 묻은 유일한 군왕이기 때문이다. 광해군태실은 현재 대구시 북구 연경동 태봉마을 북편 야트막한 구릉 말단부에 있다. 현재 태봉마을과 주변 토지는 LH가 시행하는 보금자리주택지구로 편입돼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태실로 가는 입구 길목에는 ‘연경동태실’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산길을 따라 약 300∼400m쯤 오르면 예사롭지 않게 생긴 커다란 바위 두개를 만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석조물이다. 연꽃 문양이 새겨진, 아래받침이 육각형인 석조물은 비스듬히 누워 있고, 거북같이 생긴 석조물은 깨진 채 방치돼 있다. 남쪽으로 50m쯤 내려가면 석조물에서 떨어진 파편과 망가진 비석 2개가 나뒹굴고 있다. 한 비석에는 용아지씨태실(龍阿只氏胎室), 다른 비석에는 왕자경(王子慶)이란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있다. 또 다른 석물에는 ‘만력(萬曆)’ ‘一月0日建’ 등의 글자가 보인다.

문경현 경북대 명예교수(사학과)는 “광해군태실은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파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북인을 몰아낸 정변이다. 

구본욱 위원은 “16∼17세기 대구유학은 퇴계학이 주류였으며, 이후 영·정조 때까지 율곡학과 병행해 발전하다 조선말에 이르러 율곡학이 우세를 보였다”고 했다. 

계보로 따지면 대구유림은 남인과 서인이 주류였고, 인조반정에 대부분 동조하는 분위기여서 누군가 광해군태실에 손을 댔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태실을 파괴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광해군태실은 깨진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다. 

문 명예교수는 “흩어진 광해군태실 유물을 한데 모아 울타리를 설치한 뒤 대구시지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웅 대구지오 자문위원은 “성주군의 경우 세종대왕태실을 관광자원화해 성주를 알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면서 “대구는 광해군태실과 같은 역사적 의미가 깊은 문화자원을 두고도 제대로 홍보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구 북구청은 “올해 2천만원의 예산을 받아 광해군태실 일대에 지표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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