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3    업데이트: 24-03-07 09:52

CRITIC

石鏡 李元東의 〈심매도尋梅圖〉를 보다
아트코리아 | 조회 702
石鏡 李元東의 〈심매도尋梅圖〉를 보다


석경石鏡! 중견화가 이원동의 아호雅號다. 순수한 우리말로‘돌거울’을 말한다. 21세기 최첨단 시절에 웬‘돌거울’인가?
태곳적 우리 배달민족은‘돌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고 천체를 관측하고 역학을 풀이하며 인류문명의 토대를 쌓아왔다. 그래서인지 이원동의 아호‘石鏡’이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매력으로 한결 돋보인다. 그런 그가 또 한 철 물러가는 봄을 뒤로하며 숫한 매화 중의 매화를 찾은‘묵매화墨梅畵’를 선보이게 되었다.

매화는 이른 봄 창밖에 눈발이 휘날릴 무렵에 피어난대서 흔히들 신산한 인생을 상징하는 꽃으로 비유한다. 특히 찬 서리 눈발을 헤치고 피어나는〈설중매雪中梅〉는 그가 즐겨 그리는 소재로 순수한 필묵으로만 휘영청 밝은 달빛이 흰 눈에 뒤덮인 매화의 고고한 기품을 화폭에 담아내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싸늘한 가지 끝에 눈빛 같은 꽃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는 그래서 범속한 여느 화훼류와 동조를 거부한다. 그 초연한 모습과 기개는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고현일사古賢逸士처럼 의연하기 때문이다. 하여 매화는 예부터 탈속脫俗과 고절孤節의 표상으로 백의민족의 고결한 정신을 지배해 왔다. 청빈 속에서 살아가는 선비의 기개이고 눈 속에 뒤덮여서도 꿋꿋하게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군자의 대표적인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런 매화를 순수한 수묵화로 화폭에 담은 것이〈묵매화〉다. 매화의 나무줄기나 가지 등은 먹을 사용하는‘몰골법沒骨法’으로 그리며 꽃과 꽃봉오리를 채색한 경우에도 묵매화라 불린다.

오랜 세월 풍상풍우를 견뎌내며 꿋꿋하게 뿌리 내린 거목巨木이랄까, 노목老木이랄까, 그의 묵매화는 단단하게 생긴 늙은 줄기와 차갑게 마르고 거친 가지와 눈 속에 파묻혀서도 함초롬히 봄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꽃무리를 거침없이 화면에 펼쳐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매화는 화려함보다 예스럽고 멋이 풍겨나는 고졸古拙함으로 운치를 더한다.
꽃무리는 다소 드문드문 성글게 피어나 약간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화면을 가로지르며 공간을 적절히 분할하여 여백의 공허함을 보완하고 전체 화면을 조화롭고 균형감 있게 이끌어 준다. 말이 필요 없는 살아 숨 쉬는‘매화梅畵’와의 대화다. 때문에 그의 매화 역시 대상물의 외형보다는 그 자연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을 더욱 중요시 여긴다.

매화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구도를 잡고 모든 색을 함유하고 있는 수묵을 재료로 묵매화에 천착해 왔다. 이렇게 완성한 그의 작품은 단순한 외형의 재현이나 표현 형식이 아니라 대상물이 자라고 성장하는 자연적 이치와 조화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면서 마음의 정서를〈意〉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의적寫意的 경지에서 그 가치를 추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꽃은 양陽(하늘․태양)과 음陰(땅)의 기를 받아 음양 화합으로 가지에서 망울을 틔우고 피어나는 것으로 그의 사의적寫意的 묵매화墨梅畵 역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미묘한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석경의 작업을 눈여겨 지켜보노라면 화면을 간결하게 압축시켜 핵심적인 요소만을 선택한 후 표면이 거칠고 절묘하게 휘어진 매화나무의 큰 가지와 곧거나 구부러진 잔가지들이 어우러진 고고한 자태와 풍골風骨을 표현하는 데 집념을 쏟는다. 빠른 붓놀림과 힘이 넘치는 필선은 살아 숨 쉬듯 꿈틀대고 엷은 먹으로 동그랗게 그린 꽃잎은 그림 전체에 생동감이 넘친다.
이상야릇한 자연의 형태를 통해 작가 자신의 심경을 한 폭의 매화에 나타내듯 물기 없는 붓으로 구불거리는 매화 줄기를 그리고 듬성듬성 몇 송이 꽃을 그려 넣는 기법 또한 특이하다. 이는 어쩌면 모진 설한풍을 견뎌낸 매화 줄기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한 것 같다.

그의 특이한 구도와 필치는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오늘날 문인화의 방향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먹의 농담을 달리하여 줄기의 거친 표면을 나타내는 것하며 기이하게 구부러진 가지에 활짝 핀 매화를 그려 넣은 작품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넓은 붓질로 굵은 나무 가지를 한 번에 그려 평면적인 느낌이 들도록 변형을 시도한 작품은 다소 추상적인 형태로 보이기도 하지만 고절孤節의 기품이 절로 배어난다.

그의 묵매화에는 유독 매화 가지에 둥근 달이 걸친 듯 떠있는 ‘월매도月梅圖’가 많다. 한자漢字 〈月梅圖〉의 자획을 분합分合하여 파자破字로 풀어보면 매화나무 〈梅〉는 중국식 독음讀音으로 눈썹 미眉와 같고 목숨 수壽를 나타낸다. 따라서 미수眉壽란 눈썹이 하얗게 센 노경을 뜻하며 매화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있는 그림을 일컬어〈매지상월梅枝上月〉이라 하여“장수하는 노경에 즐거움이 넘친다”는〈미수상락眉壽上樂〉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매화의 청정미는 군더더기가 없는 백매白梅가 달 아래 놓여 있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고 했다. 정적 속에 잠겨 깊어가는 밤에 달빛이 백매화를 훤하게 비춰주면 그 달빛에 잠긴 매화의 빛나는 모습을 온화하게 드러내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가지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형언할 수 없는 운치를 자아낸다.
화면 중앙에 표현한 비백飛白과 거친 질감의 굵은 가지는 흡사 찬 서리, 눈발에도 아랑곳없이 모진 풍파를 견뎌내는 굳세고 올곧은 매화나무 특유의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보인다. 이와는 달리 매화나무 가지에 듬성듬성 부풀어 오르는 꽃송이는 담묵으로 부드럽게 표현하여 요란하거나 화려한 모습보다 단아한 기품을 풍긴다. 여기에 둥근 달이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향취가 절로 묻어나는 고고한 자태가 아닐 수 없다.

울긋불긋한 색채보다 배달민족 고유의 미의식이 둥근 달 항아리 백자에서 풍기는 은은한 멋처럼 구현된 그의 월매도는 간결하지만 강인한 작가의 필치가 돋보인다. 특히 화면 하단에는 오랜 풍상을 견딘 것 같은 굵은 나무 둥치에 강렬한 필치로 비백을 형성하며 그 위에 강인한 품성으로 움터 나온 새로운 줄기는 꽃망울을 터뜨리며 또 다른 탄생을 알린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인생사처럼 무한한 생명력이 솟아나고 있다. 여기에다 화면 상단에는 둥근 보름달이 아스라이 떠올라 한껏 시정詩情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석경은 대상의 객관적인 외형이나 기교적 법칙과 조형원리를 중요시하는 일반론적 기법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심의心意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변증법적 조화를 모색하고 있다. 다만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현대적 의미의 문인화는 감상자들과 더불어 호흡할 수 있고 그 느낌을 교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현대성을 살리는 품격과 격조를 중요시 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며 고전적인 형식에서 그 범위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산시켜 표현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묵매화墨梅畵는 필법과 구도, 구성과 포치布置의 표현 양식을 창신성創新性과 독창력이 수반된 현대적 기조로 전통기법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 글. 이미애 Art content (주)wave-i 기획실장․ 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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