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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모든 것이 떠맡겨졌다 꼼짝 못 하는 남편도, 시어머니도… 2017-05-02 / 매일신문
아트코리아 | 조회 1,115

 

병원 문을 나선 지 20여 일 만에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어머니의 뜨거운 눈물이 상처 난 내 손등에 방울져 떨어진다. 칩거와 은둔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잠실에 있는 ‘선한 목자 복지관’에서 중도 실명자를 위한 재활훈련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점자를 배우고 보행 방법을 익혔다.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사고 당시 나는 적성검사 미필로 운전면허가 취소되어 있었다. 죽은 면허를 되살려야 했는데 나 대신 일을 봐 주던 친구가 내가 수술하면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경찰서에 가서 아예 신규면허를 발급받았다.

소송 준비를 하던 변호사가 경악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운전면허를 받은 것이다. 소송을 진행하면 경찰서 관계 직원을 비롯하여 적어도 20여 명의 경찰관이 옷을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왕에 붓고 있던 다른 보험도 심지어 의료보험조차도 청구하지 못했다.

<중략>

아내가 내 곁을 떠났다. 아내의 친구가 법정에서 진술했다. 어느 날 새벽에 아이들 엄마가 친구의 집에 왔다. 남편에게 맞았다며 온몸에 멍이 나 있었다고 아내의 친구가 증언했다. 두 아이에게 법원에서 보내온 '이혼하라'는 판결문을 놓고 읽어 보라고 했다. 내가 엄마에게 이렇게 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딸아이는 중학교 1년생이었고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나는 재심을 청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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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에 재학 중 휴학하고 군에 입대했다. 만기제대하고 복학했다. 같은 과 같은 반에 있는 아내와 처음 만났다. 아내와 나는 서로 사랑했다. 졸업하던 해인 1970년 11월 우리는 결혼했다. 이듬해 첫 딸아이를 낳았고 2년 후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내는 충청북도의 여유 있는 가정에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여인이었다. 호랑이 굴에 갇힌 토끼처럼 숨죽이고 순종하며 살았다. 분란 없이 화목한 가정을 이끌며 살아왔던 아내였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지혜롭게 엄한 시어머니와의 마찰을 피하며 어머니를 모셨고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구실을 만들어 눈먼 남편과 어린 자식들과 늙고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이혼하자는 말도 없었다. 판결문만을 던져놓고 떠났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떠나면서 그녀가 가지고 싶었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물에 빠져 발버둥치며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허우적거릴 때 뿌리치며 떠나간 여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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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두 번 입상했다. 그 인연으로 ‘대한주택공사’에 특채되었다. 연구소에서 주로 건축 디자인을 하던 나는 내가 설계한 도면상의 작품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건축물이 되는가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현장근무를 자청했다.

경기도 광명시를 시작으로 강원도 춘천 등 지방 도시들을 전전하며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모두 8년여를 공사판에서 살았다. 그동안 큰 딸아이는 거의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할머니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아이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또 충청도로 옮기며 자랐다. 경상도에서는 출근하는 내 등 뒤에서 “아빠야 잘 다녀 오이소”했고 충청도에서는 “아부지 잘 다녀 오셔유”해서 엄마 아빠를 웃겼다. 대전에서 아파트공사를 마치고 서울 본사 근무 명령을 받았을 때 문제가 생겼다.

아내가 서울 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아내의 본심이었다.

결국 아내에게 레스토랑을 내게 해주겠다는 조건부 약속을 하고 집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마포구 공덕동에 레스토랑 ‘마리나’의 문을 열었다.

나의 고달픈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벽 장터에 나가서 음식재료를 사들고 가게로 갔다. 그리고 회사로 출근했다. 가급적 일찍 퇴근해서 가게에 들러 영업 동태를 점검하고 자정이 넘어 아내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왔다. 회사의 녹을 먹는 대기업 부장직을 수행하면서 할 일도,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졸음운전으로 앞차를 추돌한 적도 있었고, 운행 중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해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눈을 붙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아내도 레스토랑에 대한 경험은 물론 지식도 지혜도 없었다. 하는 일마다 시행착오였고 시간이 갈수록 적자는 쌓여갔다. 결국, 사고가 났다. 우연이 아니었다. 필연이었다. 피할 수 있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아내에게 모든 것이 떠맡겨졌다. 칩거한 채 꼼짝 못 하는 남편도, 늙고 병든 시어머니도, 두 자식도, 가족 모두의 미래가 자신의 여린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내는 위기 관리 능력이 없었다. 아내는 내가 누워 있는 병실 침대 옆에서 울기만 했다. 눈을 감고 사는 방법을 나도 아내도 몰랐다.

그랬을 거다. 그래서 아내는 나의 곁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추리할 수 있는 아내와 나의 이별을 불러온 까닭이다.

아내와의 이별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 쓰러졌다. 좌절했다. 나는 폐인이었고, 인간쓰레기였다. 내가 죽으면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모진 결심을 했다. 수면제를 사 모았다. 아이들이 알아차렸다. 같이 죽자며 매달렸다. 약을 변기에 넣고 밸브를 내렸다. 일어섰다. 금쪽같은 자식들을 위해 독사의 살점이라도 뜯어서 새끼들에게 먹여야 하는 연약한 참새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당장 먹고살 일을 찾아야 했다. “안마를 배워라. 안마는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자격증이다.” 누군가가 내게 귀띔해 주었다.

안마사 자격증을 얻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맹학교에 들어가 3년간의 고등부 과정을 마치는 방법과 나의 경우처럼 중도에 실명한 사람들이 ‘대한안마사협회 부설 안마 수련원’에 입강해서 2년간의 수련 과정을 이수하는 방법이다. 물론 나는 후자를 택했다.

<5월 9일 자는 논픽션 부문 우수상 수상작인 조원웅 씨의 ‘안마사 ⑤’가 게재됩니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신문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공모 부문은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입니다. 대상 1명 500만원, 최우수상 3명 각 300만원, 우수상 15명 각 100만원 등 총상금 4천100만원입니다. 주제에는 제한이 없으며, 매년 5월경 공모를 시작합니다.

 

조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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