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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길이 끊겼다 너무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 / 2017-04-25 / 매일신문
아트코리아 | 조회 1,175

 

어린 시절,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진녹색의 산비탈 아래 노오란 초가집 낮은 굴뚝을 맴돌아 초록의 미루나무 가지를 감아 올라가는 회색 연기를 그렸고 황금빛 물결 치는 들판 한가운데서 메뚜기 잡는 누나의 뒷모습을 그렸다.

"환쟁이는 배고프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수미술을 포기했다.

미술대학에서 건축미술을 공부하고 '대한주택공사'에서 서민들을 위한 안락한 요람을 디자인했다. 1977년 청와대 파견근무 명령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행정수도 이전계획'이라는 비밀작업이 수행되고 있었다. 국가적 대형 프로젝트(Project)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긍심에 열정을 쏟아 일했다. 세계 제1의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를 그려보겠다고, 그리고 이 나라의 촉망받는 유능한 건축가가 되어 보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며 웅지를 키웠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한국 역사상 초유의 비극적 사태가 발생했다. 효자동 새벽 공기를 가르는 한 방의 총성은 모든 것을 어두운 밤하늘로 날려 보냈다. 대통령이 쓰러졌다. 애써 마련한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백지계획'안이 물거품이 되었다. 함께 작업하던 요원들이 원대복귀했다. 나도 '주공'으로 되돌아왔다. 허탈했다. 갈등하던 나는 건설회사인 ㈜삼환기업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중동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갔다. 사막의 모래 먼지 속에 콘크리트 기둥을 박으면서도 나의 건축가를 향한 꿈을 접지는 않았다.

귀국한 후 ㈜두산건설 설계부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1984년 11월 13일 내 나이 만 41세 되던 해다. 마포 '마리나레스토랑' 문을 나선 것은 밤 11시가 조금 지난 뒤였다. 제2 한강교를 거쳐 반포 잠수교를 건너 강남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런던레스토랑'으로 들어서며 대학 선배 '동재' 형에게 전화했다. 얼마 전 중동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시간을 정하지 못해 오늘 잠깐 얼굴이라도 볼 심산이었다. 나도 중동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동재 형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흥미로웠다. 칵테일 한잔을 주문해서 마시고 일어섰다.

대치동 고갯길에 올라섰다. 시간이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진눈깨비가 한둘 바람에 날리며 차창에 부딪힌다. 고갯길 네거리 교차로에 다다랐다. 신호등이 바뀐다. 노란불에서 빨간불, 다시 초록불이 올 때까지 불과 얼마나 걸릴까. 그 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오른쪽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주위가 캄캄하다. 처음 와 보는 길이다. 가로등도 안내판도 없다. 갑자기 길이 끊긴다. 너무 놀라 있는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늦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공중에 떠 있다. "쿠당탕 쾅쾅." 차가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하며 굴러 떨어졌다. '탄천' 건너 잠실벌의 마천루에서 뿜어내는 휘황한 불빛이 차창을 깨며 안으로 밀려와 번쩍하는 섬광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주위가 깜깜하다. 뜨거운 액체가 볼 위를 흐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유리 파편으로 범벅이 된 두 개의 눈알이 마치 솔방울처럼 까슬까슬하게 손안에 잡힌다.

"아! 내 눈."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내 눈은 빛을 잃은 뒤였다.

여러 차례 수술했다. 친지를 통해 미국의 유명 안과병원에 차트를 보내 타진도 했다. 무당굿도 해 보았다. 안수 목사의 기도도 받았다. 아무 소용없었다.

12월 24일 성탄 전야였다. 병실 문이 열리고, 주위가 잠시 산만하다. 이어 고운 크리스마스 캐럴이 은은하게 병실 안에 퍼진다. "병원 간호사들이에요." 옆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캐럴이 멎고 문이 닫혔다. "집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다. 병원 인턴이다. "가고 싶지요. 왜 가고 싶지 않겠어요?" 웃음기가 묻었지만 심드렁한 음색으로 내가 말했다. "가고 싶으시면 가세요. 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연말연시를 보내세요. " 병원문을 나섰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나의 손을 잡고 '강남성모병원' 안과과장이 말했다. "조 선생은 상처가 심해 여러 번 수술에도 성과가 없었어요. 내년에 일본 '소니전자 회사'에서 개발한 인공전자 눈이 나온다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나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침대 옆에서 아내가 울먹이며 내게 말했었다.

"어머니가 당신을 집에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세요."

어머니는 이역만리 먼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남편과 사별했다.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5남매를 주렁주렁 달고 서해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의 혼란, 6`25, 1`4 후퇴의 격동기를 거치며 힘든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다섯 어린아이를 키웠다. 가슴속 설움을 억누르며 자식들 잘되기만을 염원하며 살아왔다. 착한 며느리 맞아들이고, 금쪽같은 손자 손녀를 얻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 새끼들을 바라보며 응어리진 한과 시름 다 잊어버리고 살았다. 안락한 여생을, 단란한 행복을 누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청천벽력과 같은 아픔을 어머니인들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나를 인도하기 위해 배웅 나온 교인들과 함께 경기도 모 교회 기도원으로 갔다. 연말연시를 맞아 중병 환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환자와 그 가족들이 넓은 기도원 본당을 가득 채우고 울고 통곡하고 찬송하고 발을 구르고, 통성 기도한다.

경기도 기도원에서의 기도회가 끝났다. 십여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다시 대구기도원으로 이동했다.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대구까지 10여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대구에 있는 기도원을 '천국병원'이라 불렀다. 본당에 수백 명의 환자가 앉아 있다. 북소리와 박수 소리 그리고 발을 구르는 소리에 맞춰 목이 터지라고 찬송가를 부른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는 여인이 줄지어 있는 중환자들의 환부를 맨손으로 주무르며 기도한다. 구강암으로 입 주위가 망가진 여학생의 입속을 주무르던 손이 내 눈에 감긴 붕대를 풀고 눈 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기도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앞을 보게 하라!"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암 덩어리가 떨어진다. 발을 구르고 통곡하고 박수 치고 북소리에 맞춰 목이 터지라고 찬송가를 부른다. 합판으로 가려진 반 평이 될까 말까 한 쪽방 마룻바닥에 4명이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잔다. 시래깃국과 보리밥만 먹는다. "아! 정말 여기가 천국인가? 이것이 기적인가?"

<4월 25일 자는 논픽션 부문 우수상 수상작인 조원웅 씨의 '안마사 ④'가 게재됩니다.>

 

조원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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