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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안 보이면 무엇 먹고 살아갈래 2017-04-11 / 매일신문
아트코리아 | 조회 1,172

삽화 이태형 작가
 

조원웅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을 듯이 두텁게 하늘을 가린 먹구름이 무거운 듯 꿈틀대며 머리 위를 맴돈다.

2006년 8월 29일 아침 전국에서 4천여 명의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서울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국민은행 여의도지점 앞 8차로 도로를 꽉 메운 채 늘어서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후략)". 시위대 전면에 가설된 본부석의 대형 스피커에서 쉼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있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비교적 어려 보이는 맹인학교의 중`고등부 학생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다. ‘장애인도 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평등이다’ ‘장애인 죽이면서 평등권 좋아하네’ ‘안마로 살아왔다. 맹인가족 살려내라’ 학생들이 양쪽에서 받치고 선 각종 현수막이 여러 곳에서 바람에 펄럭인다.

중간중간 음악이 멈춘다. 구호를 외친다. 본부석에서 선창하면 시위대가 복창한다. "못 보는 것도 서러운데 손가락도 잘라내느냐." "너희도 안 보이면 무엇 먹고 살아갈래." "살아갈래. 살아갈래.", "안마업권 사수만이 우리들의 살길이다." "살길이다. 살길이다.", "맹인들의 생계수단 정부는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목소리를 높여 구호를 외친다. 연사들이 '대국민호소문'과 '결의문'을 낭독한다.

자원봉사대원들이 시위대원들이 앉아있는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시위대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김밥 한 덩이와 물병을 쥐여준다. 은박지를 벗기고 간간이 내리는 빗방울도 아랑곳하지 않고 움켜쥔 검은 김밥 덩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운다. 다시 음악이 울리고 구호를 열창한다. 국회 본관 안에서 열리고 있는 본회의 소식이 수시로 시위대에 전달되었다. 전해지는 내용에 따라 안마사들은 때론 환호하고 때론 한숨짓고 쉬지 않고 구호를 외쳤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났다. '대한 안마사 협회 중앙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음성이 들렸다. "존경하는 안마사 회원 동지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결국,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한나라당 정하원 의원이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하원 의원(시각장애인)이 마이크 앞에 섰다. "여러분, 지난 5월 25일 헌법재판소의 부당한 판결로 인해 박탈당했던 우리의 생존권인 안마가 다시 우리들의 손에 돌아왔습니다.(중략) 우리의 안마가 우리의 것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번 법령을 의원발의해 주신 존경하는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을 소개합니다." 보좌관이 뒤에서 미는 휠체어를 탄 장향숙 의원(지체장애인)이 무대 중앙에 있는 마이크 가까이 다가가 마이크를 뽑아 손에 들고 말했다. “사랑하는 안마사 회원 동지 여러분, 축하합니다.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입니다. 오늘 우리 국회는 여러분들이 과거 100여 년 동안 바라고 원하던 안마업을 여러분들에게 되돌려드리기 위한 길고 긴 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국회의원 208명이 찬성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장향숙 의원의 목소리가 울먹이듯 떨리고 있었다. "와!" 하는 함성이 일었다. 그것은 거센 물결이었다. 파도였다. 폭풍이었다. 천둥이었고 벼락이었다. 스피커를 타고 장향숙 의원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멎었는가 잠시 고요했다. 썰물이 밀물이 되어 역풍에 사라지듯 잔잔히 멀어진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흐르듯 흐느낌이 밀려온다. 광풍이 몰아치듯 선율이 퍼진다. 모두가 흐느끼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통곡하고 있었다. 용틀임하던 먹구름이 갈라지면서 빗줄기가 쏟아졌다.

"야! 조 원장! 와 이리 눈물이 나노." 통영 앞바다에서 굴을 까며 어촌계장하다 안마사가 된 '상일'이의 거친 쉰 경상도 사투리가 울고 있다. "바보야! 우니까 눈물이 나지. 눈물이 나긴 왜 나노." 조선소에서 용접하다 불똥이 튀어 안마사가 된 '종대'가 조롱하듯 말을 던졌다. "헛 헛" 내가 김빠진 웃음을 웃었다. 상일이도 종대도 웃었다. 벌어진 입이 닫히기도 전에 "꺼억 꺼억" 흐느꼈다. 울었다. 또 울었다. 빗물이 눈물이 범벅되어 온몸에 감겼다.

1913년 일제강점기 일제는 점령지 조선의 장애인을 위한 유화정책의 하나로 조선총독부 제생원 맹아부를 설립하고 맹학생들에게 직업교육으로 침구(뜸) 안마술을 가르쳤다. 1923년에는 제생원 졸업생들에게 안마사 자격을 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 안마제도의 시작이다.

일본과 달리 안마술은 우리 문화에 익숙한 것이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초기의 안마사들은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을 대상으로 안마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안마업은 맹인들의 새로운 직업으로 정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생원을 졸업한 맹인 안마사들이 자유롭게 안마 영업을 하게 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청 후생부는 1946년 4월 맹인들의 안마 영업을 정지시켰다.

미군들은 장애인들의 복지 문제에 앞서 맹인들이 의료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자체를 믿지 않았다. 서양의학이 과학적인 데 반하여 침구를 포함한 한의학을 열등한 의학으로 천시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의 악화와 정치적 문제, 6`25전쟁 등으로 맹인 안마사들은 직장을 잃고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서도 맹인들에게 안마 면허를 발급하지 않았고 1951년에는 국민의료법을 제정하고 안마술의 시행규칙을 폐지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의료법을 고치면서 안마에 관한 신규 면허 조항을 아예 삭제시켜 버렸다. 안마교육을 받아 직업인으로 자립하려 했던 맹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때부터 맹인들의 목숨을 건 항거가 시작되었다. 당시 담당 부서인 보사부를 점거 농성하며 생명줄을 이어 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보사부는 1963년 12월 안마사 허가에 관한 규정을 제정 공포하였고 맹인들은 드디어 신규 안마사 자격을 받음으로써 안마사는 안마, 지압, 마사지, 전기 또는 기타 자극법으로 인체의 물리적 시술 행위 등 의료보조 업무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제생원 이후 100여 년 동안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맹인 안마사들은 힘들게나마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법 유사 마사지업이 횡행하면서 안마사들은 또 다른 가시밭길을 걷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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