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8    업데이트: 17-10-2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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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인 고통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아트코리아 | 조회 1,005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④-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육체적인 고통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아프면 소리를 지르고 약을 먹으면 된다. 그 힘든 상황 속에 내 의지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또 나를 덮쳤다. 누군가 ‘사랑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잔인한 경험’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 내게 사랑 같은 것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때 내가 절망 속에 헤매고 있을 때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 내가 성공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함께하자던 그가 내 곁을 떠나갔다. 어차피 사랑은 내게 사치였지만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에서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어차피 과외를 할 바엔 서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연고가 없는 곳이 얼마나 외로운지 미처 알지 못했다. 이사라고 해야 낡은 가방 하나였지만 마음은 꽁꽁 묶인 쇠사슬보다 더 무거웠다. 지금은 K대학으로 합병된 W대학에 편입했다. 벼랑에 서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갈 곳이 없어 어릴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먼 친척 집을 찾아갔다. 일대를 샅샅이 뒤져 꽤 큰 제과점에서 밤일을 시작했다. 빵집 주인아저씨의 느끼한 눈길이 가녀린 내 목덜미에 꽂혔지만 모른 채 일에만 열중했다.

주인아줌마가 잠깐 가게를 비운 어느 날이었다. 제과점 뒤쪽에 있는 골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나를 누가 갑자기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더듬었다. 주인아저씨였다. 화들짝 놀라 들입다 그를 밀치고 빵집을 뛰쳐나왔다. 성난 주인아저씨가 계속 쫓아오는 것 같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쯤 도망을 쳤는지 길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옛날 짝꿍의 자취방 부엌에서 보았던 별 무리가 은하수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을 세다 말고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천천히 눈물을 닦고 집으로 왔다.

잠시 학교를 휴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휴학계를 제출하려고 교수님을 찾아갔다. 대강 사정을 들으신 교수님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며칠 후 그분의 소개로 꽤 큰 의류 공장에 취직했다. 밤일하는 여공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빵집보다 분위기도 좋고 여공들도 나를 언니처럼 좋아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졸업 후 나는 그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하루는 회사에 근무하는 남자 직원이 한남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센터에 같이 가자고 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회화를 배우기 위해 선교센터에 나가고 있었다. 선교사는 미국 목사님이었다. 용산에 있는 미 8군이 코앞이라 많은 미국 군인들이 드나들었다. 얼마 후 그는 내게 자기와 함께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프러포즈였는지 단순한 동료로 유학을 같이 가자는 얘기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에 나는 누구와 가까워질 수가 없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얼마 후 혼자 유학을 떠났다.

지금의 남편은 선교센터 목사의 형이다. 하루는 내게 서울 시내 관광 안내를 부탁했다. 나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그것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관광을 마친 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내게 그는 “원더풀 투어”를 연발하며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상처로 얼룩진 내가 파란 눈의 그를 만나면서 차츰 호수 같은 푸른 하늘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특별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닌 그가 점점 내 가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동생을 방문하기 위해 관광을 나왔던 그가 미국에 돌아가 제대를 하고 미 8군에 직장을 잡아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자연히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둘 사이에 옥빛 같은 싹이 탐스럽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고생도 견뎌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 내게 상처만 안겨준 한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희망도 무성해졌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사실 남편을 노총각이라고 소개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중년의 이혼남이었다. "대학까지 공부한 것이 ‘양코배기’와 결혼을 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 내 결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이상 아버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는 내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옛날의 물러빠진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무조건 내 편이어서 우리는 구청에서 박음질하듯 우리의 결혼을 호적에 올려버렸다.

내가 미국에 갈 수속을 밟고 있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연탄을 갈다 뇌진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해 버렸다. 내가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꼭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생전 처음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버지한테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왜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어요? 왜? 왜?” 내 뺨에서 번갯불이 번쩍 튀었다. 분을 못 이긴 아버지가 내 뺨을 후려쳤다. 화산이 폭발하듯 울부짖는 나를 옆에 있던 친척들이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뒤뜰로 뛰쳐나갔다. 흰 눈 속에 잠긴 텃밭이 차갑게 떨고 있었다. 어머니가 수도 펌프로 힘차게 물을 틀고 계셨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발등을 간질이며 철철 쏟아졌다. 나는 시멘트 바닥에 뽀드득뽀드득 발을 비비며 헤헤헤 마냥 웃었다. 어머니가 쪽박으로 물을 가득 떠서 내 발등에 쭈르륵 끼얹으며 발등을 씻겨주었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어머니가 시원하게 품어주던 펌프였다.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수도 펌프를 만지자 묵직한 손잡이는 꽁꽁 얼어붙어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윙윙 몰아치는 강둑으로 올라갔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늘 나를 기다리던 언덕에 서서 은빛으로 흐느적거리는 드들 강을 보며 서럽게 울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쫙 깔려 있었다.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반짝거리며 가만히 내게 속삭였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찬바람에 찢기는 나뭇가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지 바르르 몸을 떨며 내게 아는 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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