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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연재삽화모음

상념 26x18cm 2017년3월14일
아트코리아 | 조회 1,006

상념 26x18cm  2017년3월14일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2>-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집애가 한글을 깨쳤으면 됐지 무슨 중학교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면 중학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하겠다는 딸을 아버지도 잡아 앉히지는 못했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주고 나는 그 힘으로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갔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나는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은 내 학창 시절의 가장 클라이맥스였다. 아이들은 수석으로 입학한 나를 부러워하고 어떤 애들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고,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나는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생의 애착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러나 내 인생에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코 고등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나의 존재의식도 찾지 못했으리라.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고등학교 2학년 초 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드들 강을 왼쪽에 둔 작은 마을로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 벽촌이었다.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전깃불이 없다는 것은, 달리는 차에 가스가 떨어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환영받지 못한 공부였기에 도시라고 학교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 비하면 엄청나게 다른 문화생활이었다. 책상도 없는 방바닥에 엎드려 등잔불을 밝히고 공부를 하다 잠들기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온몸을 고스란히 태운 등잔이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내 머리맡에 엎어져 있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드들 강을 가운데 두고 제방 둑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목포로 가는 신작로에서 드들 강다리를 건너기 전에 버스를 내려 둑을 타고 1.6km쯤 내려오면 우리 마을이 보이고 동네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바로 두 번째가 우리 집이었다. 드들 강에서 수문을 빠져나온 물이 집 앞길을 따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었다. 굽이쳐 흐르는 물처럼 나를 향한 불행이 넘실넘실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통학을 하며 가장 힘든 것은 흰 교복이었다. 하얀 교복에 꼭 필요한 세탁소가 읍내에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유일한 세탁소는 우리 마을에서 드들 강을 건너 1.6㎞ 정도를 가야 했고 어쩌다 비가 와 강물이 불면 둑을 타고 올라가 다리를 건너서 3㎞ 이상을 걸어야 했다. 아버지가 세탁비를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 시간에 세탁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외버스 간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좀 수월했으련만. 새벽에 일어나 남평역까지 4㎞가 넘는 길을 걸어가 기차통학을 해야 했다. 기차는 언제나 콩나물시루였다. 그 속에서 비비고 몸살을 치다 종착역에서 내리면 흰 교복은 물에 빤 행주 같았다. 하교 때도 푹푹 찌는 열기로 열차 안은 스팀 통처럼 뜨겁고 찐득거리는 땀 냄새와 고단한 삶에 지친 얼굴들이 뿜어내는 한숨으로 숨이 막혔다.

하얀 교복은 땀에 절어 다음 날 다시 입을 수가 없었다. 두 벌뿐인 교복을 주말에 깨끗이 손질했지만 그것으로 6일을 입을 수는 없었다. 특히 매일 갈아입어야 하는 하얀 상의는 골칫거리였다. 땀에 전 교복을 입고 생글거리는 친구들 앞에 설 수도 없었다. 나는 점점 친구들과 멀어지고 어느새 외톨이가 되어갔다. 1년 전, 한껏 부푼 꿈을 안고 가슴을 쑥 내밀고 활개치고 다니던 것이 아련한 옛일 같았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지친 어머니가 밤에 등잔불 아래서 어렵사리 교복을 빨아, 숯불 다리미로 대강 주름을 펴주곤 했다. 어쩌다 졸음에 빠진 어머니가 다리미질을 하다 까만 숯검정이 흰 교복에 묻기라면 하면 나는 어머니한테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다.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잘못인 듯 철없이 굴었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 군데군데 박힌 그 상처의 흔적들,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발자국들이다.

하행 열차가 서서히 남평역에 들어서면 막혔던 하수구가 터지듯 쏟아져 내린 통학생들은 개미가 구멍을 찾아가듯 뿔뿔이 흩어져갔다. 풀풀 날리는 흙먼지 속에 뜨겁게 달궈진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해어진 운동화 뒤축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끼어들었다. 나는 두어 발짝마다 절름발이처럼 발을 흔들어 발바닥을 콕콕 쑤시는 돌멩이를 털어내곤 했다. 길게 늘어진 석양빛 그림자 위로 축 늘어진 책가방이 못 빠진 간판처럼 내 어깨에서 대롱거렸다.

드들 강 언덕의 겨울밤은 은빛 바다였다. 일찌감치 해를 삼킨 어둠이 거대한 몸통을 드러내면 제 세상을 만난 칼바람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발가벗은 나뭇가지들은 견디다 못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 속에 하얀 눈사람이 희미한 달빛 아래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였다. 나는 이 기막힌 현실이 모두 어머니 탓인 듯 심통스럽게 훌쩍거리곤 했다. 어머니가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말없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묵직한 내 가방을 받아들었다.

<중략>

터벅터벅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기가 멋쩍어 나는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아, 하늘에는 얼마나 별이 많은지, 저 많은 별 중에 내 별은 어느 것일까.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별아, 별아 너는 나를 보고 있겠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밤새 부뚜막에 앉아 별과 얘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취직을 하든지 시집이라도 가라고 매일 잔소리를 하셨다. 그러나 시골에 처박힌 내가 취직자리를 알아볼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인생을 팽개치듯 아무한테나 시집을 갈 수는 더구나 없었다.

어느 날, 들일을 마치고 집 앞 물가에서 발을 씻다가 갑자기 쿵하고 물속으로 굴러떨어졌다. 헤엄을 칠 줄 몰라 허우적거리는 나를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건져주었다. 아버지가 지나가다 손을 씻고 있는 나를 뒤에서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자존심 센 아버지가 자신의 야망과 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들들한테 걸었던 기대마저 무너지자 그 화풀이를 내게 한 것이었을까. 희망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인생을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그래서 아무한테나 시집도 갈 수 없는 내가 미워서 나를 건져준 아저씨를 원망하며 강둑에 퍼질러 앉아 한참을 울었다.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저 구름도 자기 갈 길을 알고 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득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집에 돌아와 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보따리를 쌌다. 울며 붙잡는 어머니를 모질게 뿌리치고 철창처럼 내 앞을 가로막던 드들 강을 건넜다. 강 언덕에 망연히 주저앉아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건너편 둑 너머로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어머니는 얼마나 울었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어머니도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때 집을 떠나지 않는다면 나는 거기서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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