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소 : 이상화 시인 생가
● 위 치 :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12번지
● 이 야 기 :
많은 이들이 계산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화 고택을 ‘생가(生家)’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제 생가는 바로 서성로에 자리 잡고 있다. 백부인 소남 이일우 선생이 1921년 신축한 길 건너 서성로 1가 44번지 집도 이상화 시인의 출생과는 관련이 없다. 서문로 2가 11번지와 12번지는 본시 한 울타리 안에 있었고 대소가가 같이 살았는데, 1908년 부친의 사망으로 장남인 상화의 형 이상정이 호주가 됨에 따라 문밖 12번지에 집을 지어 옮긴 것이다. 상화가 훗날 ‘담교장(淡交莊)’이라 부른 유명한 사랑채는 11번지에 있었다.
이상화 시인 생가를 나타내는 안내판 옆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큰 감나무가 서있는 그의 생가(生家)를 만나게 된다. 검정색 대문이 굳게 잠긴 이곳은 지금은 다른 주민이 살고 있어 안을 쉬이 들여다보긴 힘들다. 다만 대문 옆으로 작은 안내판이 붙어있다. ‘한국현대문학의 선구자이며 항일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선생께서 태어나 청년기를 보내며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발표하여 민족의 의기를 드높인 역사적인 집터가 이곳에 있다.’라고 쓰여 있다. 역사적인 집터라고 표현은 하면서도 고택을 보존한 것에 비해 생가는 안내판만 있을 뿐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버스정류장 광고판에도 이상화 시인의 고택을 홍보하고 있지만 생가 홍보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아마 이런 이유로 고택을 생가로 착각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아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출처 : 문화산업 전문 기업 ATBT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
여기는 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이며 항일 민족 시인 이상화(1901~1943) 선생께서 태어나 청년기를 보내며 대표작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여 민족의 의기를 드높인 곳으로 그 역사성을 기념하고자 표징물을 설치한다.
출처 : 좋은 습관 지식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