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 시인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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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6    업데이트: 17-12-11 09:39

상화 앨범

대조적인 두 형제, 李相定과 李相佰
아트코리아 | 조회 1,294


문중에 따르면, 상화의 큰형 이상정(1897~1947)은 “중국 장개석 군대 밑에서 국부군(국민군) 고위 막료를 했다”고 한다. 임시정부 수립 당시 통위부 장관을 지낸 유동열(柳東說),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金日成)이 다니던 만주의 화성의숙 교장이었던 최동오(崔東旿·그의 아들이 최덕신 장군)가 이상정의 의제(義弟)들이다. 충희씨는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 장군이 어린 시절 아버지 형제들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세 분이 만주에서 결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정은 스물다섯에 결혼해 1남1녀를 낳았으나 중국 만주로 망명(1923년), 광복 후인 1947년 일시 귀국할 때까지 집을 떠났었다. 딸 이선희는 양조장을 하는 배씨 집안(포항)으로 시집갔고, 아들 이중희(李重熙)는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임한 뒤 20여 년 전 사망했다. 그는 3남1녀를 뒀는데 큰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문예 방면에서 활약하는 후손은 없다고 한다. 한 후손의 말이다.

“이상정은 광복 때까지 중국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으로 항일운동을 펼치셨던 분입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대한독립군 중장이었어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으로 취임했고, 중화군사령부(中華軍司令部)의 막료직도 겸했어요. 그런데 1947년 일시 귀국했다가 안타깝게도 대구 본가에서 뇌일혈로 운명하셨습니다.”


상화의 첫째 동생으로 IOC위원을 지낸 이상백.

이상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權基玉·1903~1988)과 결혼했다. 일설에는 해방 전까지 자신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문중에 따르면 “두 분 사이에 후손이 없어 집안 호적과 족보에 ‘권기옥’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했다. 권기옥에게는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충희씨의 말이다.

“큰아버지 이상정이 광복 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있었어요. 그 이유는 중국군이 해방 후 한국에 진주(進駐)하려던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다리다가 미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못 오시게 됐어요. 제가 경북중에 다닐 때였는데 백부님이 귀국해 학교 강당에서 강연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이상화의 동생 이상백(1903~1966)은 문무(文武)를 겸비했다는 평이다. 어찌 보면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정과 대조되는 인물이다.

대구고보(지금의 대구고)를 나와 와세다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와세다대 농구부 주장으로 활약했고 미국 원정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도쿄올림픽 초치(招致)위원으로 활약했고 해방 후 서울대 교수와 한국사회학회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원을 거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했다. 문중 한 인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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