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 시인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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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6    업데이트: 17-12-11 09:39

상화 앨범

뒷줄 가운데가 상화의 부인 서순애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아트코리아 | 조회 1,367


이상화의 후손들. 뒷줄 가운데가 상화의 부인 서순애 여사다. 그 왼쪽이 충희씨 부부, 오른쪽은 3남 태희씨 부부다.(1980년대 찍은 사진이다.)

 

‘성심을 다해 남편을 기다려 온 아내의 미덕을 경애했다’

 

 이상화의 장남 용희(龍熙)씨는 1926년, 차남 충희씨는 1934년, 3남 태희(太熙)씨는 1938년 태어났다. 결혼(1919년)에 비해 자녀출생이 늦은 까닭은 상화가 일제 검속을 피해 도망 다녔고 《백조》 동인활동을 위해 자주 서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당시 문우(文友) 나도향·현진건·박종화 등과 ‘음주행각이 심했다’는 기록도 있다.

1922년에 도일(渡日), 도쿄의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는 등 외지로 떠돌아 아내와 자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중에 따르면 “30대 후반 이후 대구에 정착하면서 아내와 부부의 정이 깊어졌다. 이상화는 ‘줄곧 성심을 다해 남편을 기다려 온 아내의 미덕을 경애했다’”고 한다.

이상화의 장남 용희씨는 1966년 병사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이 없다. 문중에 따르면 “장남의 사망으로 어머니 서순애가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의 세례 대모(代母)는 장면(張勉) 총리의 아내다. 세례명은 베로니카”라고 했다.

차남 충희씨는 경북고와 해양대 기관과를 나와 원양(遠洋) 어선을 탔다. 그는 “외교관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해외견문을 넓힐 수 있는 직업이 마도로스라고 생각했다. 배를 타다가 사고가 나서 잠시 귀국했는데 5·16이 터졌다. 집안에서 배 타지 말라는 강권이 심해 그만뒀다”고 했다.

이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흥국상사 창업주 서정귀(徐廷貴·1919~1974)의 회사로 이직했다. 훗날 호남정유 사장을 지낸 서정귀는 이상화의 5촌 조카사위다. 충희씨는 흥국상사 요직을 거쳐 계열사인 흥국공업 회장을 지냈다. 그는 아버지 상화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각별했고 자상했습니다. 제가 대구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1주일 동안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곤 하셨어요. 그림 동화책도 읽어 주신 기억이 나는데 그게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집안 형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몸집보다 도량이 넓고, 심중이 깊은 대담한 어른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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