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 시인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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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6    업데이트: 17-12-11 09:39

상화 앨범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대한독립군 중장… 동생 이상백은 IOC 위원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아트코리아 | 조회 1,608

 

왼쪽부터 이상화, 이상백, 어머니 김신자, 이상호. 뒷줄 서 있는 이가 이상정

 

 


‘지금은 남의 땅!’이라 외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1901~1943).

〈나의 침실로〉에서 ‘마돈나,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던 로맨티스트 이상화는 시혼(詩魂)과 민족혼(民族魂) 모두를 지녔던 시인이었다.

22살(1922년) 낭만·유미주의를 표방한 《백조》 동인으로 시의 세계에 입문, 25살(1925년)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발기인으로 참가하며 ‘펄펄 끓는’ 저항시로 나갔던 그는 해방을 앞둔 1943년 사망하기까지 60여 편의 시와 시조, 소설 2편(번역소설 5편)과 산문 20여 편를 남겼다. 사인은 위암(胃癌).

 

이상화의 아들 충희(忠熙·82)씨는 “일경(日警)에 가택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당신의 시고(詩稿)를 압수당해 버렸다. 아버지는 평생 요시찰 인물이었다. 해방 후에는 시인 임화(林和)가 선친의 시집을 출판하겠다며 원고를 가져갔지만 월북하는 바람에 돌려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충희씨는 현재 경기도 분당에 살고 있다. “아버지 초기 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시어와 주제가) 강해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시인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20세기 후반 들어 더 좋아졌다고 할까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세요. ‘상화 시를 이북(以北) 사람이 더 좋아한다’고요. 항일시를 썼으나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유일한 분이라는 겁니다. 사실, 카프에 가담한 문인 중 전향하지 않은 이가 없어요.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선친이 오래 사셨다면, 하고 말이죠. 그래도 변절하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없으나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까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상화의 호적에는 ‘대구부(大邱府) 명치정(明治町) 2정목(丁目) 84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대구시가 이곳을 상화 고택(古宅)으로 조성했다. 또 그가 태어난 ‘대구부 본정(本町) 2정목(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는 표징물이 설치돼 있다.

이상화는 열아홉 되던 1919년, 달성 서씨 집안인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해 3남을 낳았다. 서순애는 충남 공주의 명문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다. 서한보는 구한말 공주군 참사를 지냈고 당시 공주지역 대부호였다고 한다. 이충희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순애의 큰오빠 서덕순(徐悳淳)은 1947년 미군정 시기 충남도지사를 지냈어요. 서덕순은 와세다대 정경과를 나왔는데 신익희 선생과 와세다대 동문이었어요. 백부 이일우(李一雨)의 사위인 윤홍열(尹洪烈·일제시대 《대구시보》 사장 역임)이 일본 유학시절, 서덕순과 교우(交友)한 것이 ‘공주처녀’와 결혼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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