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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보도

만학으로 이룬 평생의 꿈…다시 찾은 삶의 봄 김수영기자 2017-11-03 영남일보
아트코리아 | 조회 1,245
 
■ 인생 백세시대, 배움엔 때가 없다
 

민화작가이자 갤러리공감 대표인 박두봉씨가 민화를 그리다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박두봉 갤러리공감 대표

어릴 적 조부모와 살며 민화 늘 가까이, 결혼·교직 접은 후 잊었던 민화를 취미로
북아트 강사 활동하며 유명 민화가 사사, 50대엔 관련 석사학위…민화작가의 삶


지난 9월 대구 달서구 월곡역사공원 부근에 아담한 갤러리 하나가 문을 열었다. 월곡역사공원의 소나무숲이 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오는 ‘갤러리공감’으로, 민화작가 박두봉씨(57)가 작업실로 마련하려던 공간을 갤러리로 바꿔 오픈했다. 개관전으로 박남철 계명대 교수의 전시를 열었으며 두번째 초대전으로 11월에 홍원기 대구교육대 교수의 전시를 가질 계획이다.

“민화를 너무 좋아해서 그림만 그리고 살았는데 제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상설전시하고 작업실로도 쓰려고 마련했지요. 전시공간이 좋다보니 일반 갤러리로 운영해 지역작가들에게 도움을 줘도 좋겠다는 지인들의 권유가 있어서 지역 대표화가들의 전시를 가지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초대전과 제 작품의 상설전시를 병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지역에서 민화작가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박씨는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다. 고향인 영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결혼하면서 직장을 관두고 대구로 이사 와서 취미로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민화작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는 처음에는 북아트 강사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조부모와 함께 살면서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민화 등의 전통한국화, 고서 등을 늘 가까이 보면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북아트를 하면서 민화를 책의 내용에 삽입하고 고서처럼 책을 만드는 등 그만의 교육방식으로 인기강사가 됐다. 북아트를 하면서 접하게 된 민화에 빠진 것은 민화가 가진 치유력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민화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서울 등 전국의 유명 민화가들을 찾아다니며 사사했다. 그 당시 개인적 아픔이 있어 심적 고통이 컸는데 취미로 시작한 민화가 큰 도움이 됐다. 그렇다보니 민화만 붙들고 있었다.

“민화를 그리다보면 어릴적 고향으로 되돌아가 할아버지, 할머니 등 지금은 돌아가신 가족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민화를 완성하는 재미와 그리는 과정에서의 이같은 경험이 저를 더욱 민화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는 민화 속 내용이 가진 상징적 의미도 좋았다는 말을 했다. “민화에는 우리 삶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꽃, 나무, 바위 등은 물론 작은 점 하나에도 의미가 있지요. 그림을 그리면서 가족이나 주위 사람의 부귀영화, 다산, 장수 등을 기원하기 때문에 붓을 들고 있는 내내 기도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행복이 40대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계명대 동양화과에 편입하도록 자극했다. 민화를 좀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후진양성 등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바람에서였다. 계명대를 졸업한 뒤 2010년 대구교육대 교육대학원에 입학, 석사(조형창작교육)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구, 서울 등에서 3차례의 개인전도 열었다.

올해 갤러리공감을 열면서 작업에 좀더 매진하려고 대학강의도 그만두었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게 해줄지 몰랐다는 박 대표는 “작품에 더욱 매진해 좋은 작가로 남고 싶다. 대학에 편입하고 대학원까지 간 것도 좋은 작가로서의 배움을 다지고 싶어서였다”며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고 더욱 절실하다. 남들이 알아주기보다는 나 자신의 충만감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의 행복한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고 말했다.


 
 

만촌시니어교육문화센터에서 강의하고 있는 이경옥 도예가. 문화센터의 학생들처럼 그 역시 만학도이다. <영남일보 DB>

이경옥 도예가

15여년 前 힘든 시기에 큰 힘이 된 도예, “같이 공부하자” 딸의 제안에 공예 전공
수많은 강의·개인전·입상…바쁜 나날, 도자·진주 결합한 진주브로치로 큰 인기


‘진주도예’로 잘 알려진 이경옥씨1955년생(만 62세)는 도예를 만드는 흙을 자신의 생명수라고 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 육체적·정신적으로 피폐했던 자신의 삶을 되살아나게 해준 고마운 존재가 바로 흙, 즉 도예였다.

15여년 전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좌절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에게 큰 힘을 준 것은 대학과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두 딸과 도예였다. 도예에 빠져있던 그는 “같이 공부하자”는 딸들의 말에 용기를 얻어 40대 후반에 대구가톨릭대 공예디자인과에 입학했으며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조형학 박사과정 3학를 마쳤다. 11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입상 경력도 있다.

이씨는 특히 진주 브로치로 유명하다. 2006년부터 제작한 이 브로치는 빨강, 파랑, 초록 등 강렬한 색상의 도자 조형작품 위에 작고 하얀 진주를 붙여서 만들었다. 도자와 진주라는 이색적인 소재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 브로치는 예술성까지 갖춰 색다른 감각의 장신구를 찾는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도예를 늦게 시작했지만 열정은 컸다. 그래서 학교 작업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연습했으며, 후일 나에게 도예를 배우러 오는 제자에게도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며 “내가 도예를 접하고 이를 좀더 깊이있게 공부하면서 삶의 희망을 찾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이 말 끝에 그는 도예의 장점을 줄지어 이야기했다. 도예는 단순히 흙으로 기물 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예를 어떻게 해 나가느냐에 따라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정서적 치유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최근 인물상에 푹 빠져있다. 인간관계가 주는 따스함에 깊이 젖어든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2m 높이의 석가모니불을 만들어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에서 점안식을 가졌다. 大관음사의 회주인 우학 스님의 수행하는 모습을 도예작품으로 만들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도자기를 하면서 제가 마치 연극배우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살기가 팍팍해도 연극배우는 무대에 서면 웃음이나 눈물로 관객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도예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으로 감상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다보면 저절로 작업에 몰입하고 그 과정에서 저도 행복해집니다.”

그는 특히 도예를 배우려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학생과 함께 멋진 연극 한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극배우에 따라 관객의 느낌이 다릅니다. 제가 좋은 연기를 펼치면 관객도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가르치고 더 활기차게 수업하려 합니다. 도예를 하면서 새로운 삶의 활기를 얻는 모습을 보면 절로 힘이 솟아납니다.”

나이는 60대지만 몸은 40대란 말도 했다. 인생에서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40대의 활기와 경륜을 도예를 통해 표현해보고 싶다는 의미다. 그는 대학에 들어간 후 해를 거듭할수록 더 젊어져가는 느낌이란 말도 전했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이들의 생각과 감각을 배우고 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통해, 도예를 통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 인생은 도예를 하면서부터 봄이 찾아오기 시작했지요. 이제 완연한 봄을 맞아 인생의 꽃을 피우는 시기라는 생각이 드니 나이를 되새겨볼 생각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 삶이 좋습니다.”  

 

 
 

박복조 국제펜한국본부 대구회장

아버지 사업실패로 꿈 접고 약학도 길 , 약사·주부로 살다 40대 수필가·시인 등단
2012년 일흔에 대학원行 쪽잠 자며 공부, 어릴적 못다 이뤘던 문학소녀의 꿈 이뤄


2012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박복조 국제펜한국본부 대구지역위원회 회장(75)은 드디어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꿈을 이루게 됐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입학생 중 그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등교할 때마다 한시간 이상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밤을 새워가며 리포트 작성, 시험공부 등에 매달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박 회장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 바로 대학원 진학이라고 했다. 석사과정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올해 수료했다. 현재 김춘수 시인과 관련한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무엇이 그토록 문학공부에 매달리게 했을까. “어릴 때부터 문학소녀였고 시인이 되고 싶었지요. 당연히 국문학과에 진학하리라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약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공부에 쫓겼지만 대학 학보사에서 활동하고 습작도 꾸준히 했지요.”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약국을 열었고 뒤이어 결혼해 4명의 자녀를 키우느라 문학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약국 운영에 양육까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다. 새벽에 출근해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지쳐 잠잘 시간마저 늘 부족했다. 거기다 남편이 공직생활을 하다보니 서울을 비롯해 경북 일대를 돌아다니며 내조에도 힘을 쏟아야 했다.

그렇게 가족들을 위해 살던 그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손을 놓고 지냈던 문학서적을 다시 들었고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다시 펜을 쥐게 됐고 1983년 ‘수필문학’으로 수필가로 등단했다. 시 공부도 병행했던 그는 96년 ‘차라리 사람을 버리리라’를 내며 등단했다. 이외에 ‘세상으로 트인 문’ ‘빛을 그리다’ 등도 냈다. 이런 활동으로 대구의작가상, 국제펜대구아카데미문학상을 받았고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장,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처럼 바쁜 와중에도 그가 뒤늦게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것은 그의 못다 이룬 꿈을 기어코 이루고 싶어서였다.

“일흔이 넘어서 대학원에 가겠다니 남편과 아이들이 말렸습니다. KBS 극작가로 일했던 딸만 지금 안 가면 다시는 못 간다, 마지막 기회라며 저에게 힘을 주었지요. 딸의 그 말에 용기를 내 도전했는데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행복과 보람은 분명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뒤늦게 공부하는 만학도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했다. “공부는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 목표만 확실하다면 그 목표는 꼭 달성할 수 있지요. 나이를 생각하며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말고 확실한 목표를 설정해 좀 무모하다 싶어도 도전하십시오. 그렇다고 너무 조급증을 내지 말고 꾸준히, 천천히 나아가십시오.”

그는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즐기는 마음으로 참아내야 한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러다보면 처음 마음먹었던 것을 끝까지 가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뒤늦게 문학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도 진심 어린 당부를 했다. 남과 다른 눈으로 사물과 인생을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획일적인 것에 빠져들기 쉬운데 여기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진실된 삶을 살면 그것이 자연히 작품에 배어나온다.

박 회장은 인터뷰를 이렇게 끝냈다. “하고 싶은 일은 평생을 통해 꼭 이루어내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없는 삶이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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