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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석여행기

함목의 달을 찾아서 - 거제 탐석기
이구락 | 조회 1,051

함목의 달을 찾아서 - 거제 탐석기

 

 

작성자 : 몽석 이구락

작성일 : 2004-10-09

조회수 : 441

 

 

포산과 나는 대구 근교의 짧은 탐석길에서 자주 거제의 함목 얘기를 나누었다. 연녹색 바탕의 파스텔화 같은 서정적인 그 산수경을 사진으로 접할 때마다 목이 말랐지만, 풍문에 들려오는 가장단속이 심한 돌밭이란 소식에 함목은 점점 더 풀어야할 숙제처럼 마음에 쌓여갔다. 드디어 우리는 그 숙제를 하기로 했다.

 

2004년 10월 2일, 토요일이었지만 출발이 늦어져 밝을 때 목적지인 거제 남단 함목에 도착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자 오히려 느긋하게 구마고속을 달릴 수 있었다. 차창에 부딪치는 가을햇살이 유난히 청랑한 주말 오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통영국도에 들어서자 고성 용석 이야기가 나왔고, 포산은 아직 용석이 없다기에 배둔의 수석가게에 들러보기를 권했다. 여행이란 이렇듯 예정에서 조금 벗어나는 재미가 있어야 더욱 유쾌하다. 요즘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경기불황을 피부로 느끼지만, 이곳도 겨우 한두 곳만 남아 고성용석의 맥을 잇고 있었다.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하여 한 점씩 구입하고 다시 출발할 때는 애마의 고삐를 포산에게 넘겼다. 우리 두 사람의 탐석행은 늘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참 마음이 편하다.

 

조수석에 앉자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고, 거제대교를 통과할 무렵에서야 다시 깨어나보니 이미 어둠이 짙어져 있었다. 한결 맑아진 머리로 지도를 보며 사곡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가장 빠른 길로 남행하니 30여분만에 학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내가 핸들을 잡고 함목으로 향하니 이내 고갯마루 길변에 '해금강 휴게소'가 나왔다. 안성의 해월 조상학님이 1년 남짓한 기간에 거제를 13번이나 찾은 그 중심에 신영길(거제해동수석회 회장)님이 있음을 익히 아는 터, 휴게소에 들리니 신회장님이 초면임에도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아주셨다. 차 한잔 나누는 사이 동서가 경영하는 함목비치로 전화를 해 보더니, 마침 조치원에서 오치 윤여빈 화백 내외분과 통영의 김준섭(거제해동수석회 자문)님 내외분이 와 계시고 빈방도 있어 함께 함목비치로 갔다. 열아흐레 달이 교교히 함목의 밤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저런 월석 한 점 만나러 전국에서 얼마나 많은 수석인이 이곳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애석인의 만남은 통성명만 끝나면 이내 서먹함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게 왠 일, 맥주 몇 병을 땄지만 희한하게도 세분의 사모님들만 한두 잔 하시고, 김자문님과 오치화백은 전혀 술을 못했다. 그래도 모두 천석고황의 기질과 수석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밤늦도록 돌이야기가 이어졌다. 김자문님의 여유와 오치 화백의 해학, 신회장의 열정이 어우러져 자정 가까운 시간에 다대리에 있는 신회장 자택의 석실 방문으로 이어졌다. 신회장은 석력이 10년 정도인데도 그 사이 열정을 쏟아부은 흔적이 역력했다. 함목을 중심으로 한 해금강 일대의 돌이 주류를 이루지만, 거제 해석의 진수를 보이며 전국의 해석이 다양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젊은 석실 주인은 그림과 조각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고 또 저명한 분들의 글과 그림, 수석병풍 등을 갖춘 것으로 보아 그 열정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이 석실을 보지 않았더라면 거제를 열 번 다녀가도 거제돌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리라. 다음날 김자문님의 석실까지 너무 좋은 거제 해석을 한꺼번에 접해 소화불량에 걸렸지만, 이건 분명 엄청난 행운이었다. 신회장께서 함목돌 두 점을 선물로 내 놓았을 때, 우리는 몇 번이나 서로 우선권을 양보했고 마침내 오치화백께서 두 점 다 걷어가서 주머니 속에 넣고는 하나씩 선택하라고 했다. 결국 포산이 먼저 선택하니 함목을 대표하는 녹색돌이었고, 나는 유리알같은 수마의 오석이었다. 모두 한 바탕 웃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으랴.

 

폰의 모닝콜이 5시반에 우리를 깨웠다. 아직 어두웠으나 우리는 새벽추위에 대비한 두터운 복장으로 돌밭에 내려섰다. 가로등 불빛으로 돌을 몇 점 비춰보자 이내 동이 텄고, 그 유명한 함목돌밭에서 정신없이 2시간 정도 탐석을 했다. 그러나 도무지 돌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석질이 약해보이는 돌만 골라 물칠을 해가며 문양 탐색을 했으나 이건 또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결국 돌밭이 뒤집어지는 태풍이라도 만나거나, 아니면 멀리서도 돌이 눈에 들어오도록 많은 경험이 쌓여야 할 것 같았다. 강돌 탐석에서는 농석(弄石)의 경지를 어느 정도 터득하고 왼종일 돌과 놀다 빈손으로도 귀로에 오를 수 있는데, 해석에서는 아직 빈손 귀가 어렵고 특히 지금은 녹색 돌에 대한 집착이 함목의 다양한 다른 돌을 살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침식사 후 한번 더 돌아볼 양으로 돌아서 나오는 데 주민 한 분이 내려와 나가라고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우리는 나오는 길이라 마찰은 없었지만, 오치화백 사모님 혼자 멀리 물가에 있다가 쓴소리 한 마디를 들은 것 같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해금강으로 이동했으나, 돌이 너무 크고 화강암이라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이내 여차로 갔다. 여차도 간혹 단속이 나온다고 하지만 일단 주민이 없어 마음놓고 탐석에 몰두할 수 있는 좋은 돌밭이다. 주차비 2천원을 내고, 되돌려놓기 위해 집에서 가져온 해석을 들고 돌밭으로 내려가니 넓은 돌밭에는 탐석꾼과 낚시꾼, 소풍객 등이 10여 명 보였다. 이곳에서 우리는 3시간 정도 마음껏 탐석을 즐겼다. 주로 홍매를 찾았으나 크기가 좋으면 수마가 안된 상태여서 소품만 몇 점 챙겼다.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학동으로 나오는 길에 해금강휴게소에 들러 신회장님 내외분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오치화백의 돌배낭이 주인과 떨어져 휴게소에 남아있다가 우리 차에 실렸다. 혼자 겨우 들 정도로 무거웠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에서 출발할 때 선물용으로 한 배낭 넣어 내려왔는데, 귀가할 때쯤 되니 받은 선물로 다시 한 배낭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비우면 채워진다는 것은 진리일 터, 오치화백 내외분의 탐석유람이 더없이 넉넉해 보였다. 오치화백과 김자문님은 농소 탐석을 끝내고 이미 통영의 김자문 댁에서 쉬고 있었다. 학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호젓한 수산 돌밭에 들러 1시간 정도 탐석하고 통영의 김자문 댁으로 향했다. 이번에 들린 4곳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으나, 이미 여차에서 한번 또 이 수산에서 한번 김자문님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거제대교를 지나며 전화를 드리니, 감시카메라 두 개를 통과하고 빠져나오면 기다리겠다고 하여, 둘이서 한참 웃었다. 핸들을 잡으면 원수같이 느껴지던 그 감시카메라가 이정표가 되다니….

 

김준섭님 댁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아파트였다. 어제 본 신영길 회장의 석실에서는 깔끔하고 집중적인 예리함이 느껴졌는데, 김자문님의 석실에서는 차원 높은 구도를 지닌 문양석들의 격조와 오랜 석력에서 배어나오는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사모님의 부침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운전 때문에 포도주를 한잔밖에 못 마신 아쉬움 속에서 나눈 석담은 이내 또 날을 어둡게 만들었다. 양석용 함지박 속에서 한점씩 골라보라는 주인의 배려에 염치 불구하고 녹색 함목 소품을 취했다. 오치화백 내외분과도 작별하고 귀로에 올랐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대구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포산은 이번 탐석행의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한 마디로 짧지만 장엄한 여행이었다."

연녹색 함목돌의 그 매끄러운 촉감을 떠올리며, 나는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해금강 구형석(8 *8*7)

                                  

                                      

    

   

 

 

 

 

 

 

 

    

 

 

 

 

   

 

수산 색채석(11*9*7)

 

 

 

 

신영길회장님 선물석(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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