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    업데이트: 12-07-06 14:21

읽을거리

대구·경북 근대화 100년 - 문학(하)
이구락 | 조회 1,102

 

 

 

대구·경북 근대화 100년

-(10.끝) 문학(하)

▨ 한국전쟁과 전시문단(1950~196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대구로 몰려든 피란 문인들은 지역 문인과 공존하면서 '문총구국대'(50년)와 '종군작가단'(51년)을 조직해 '전선시첩'과 '전선문학'을 간행하는 한편 진중문예 활동과 선무공작을 펼쳤다.

 

지역 문인은 유치환·이설주·이원수·장덕조·조지훈·박목월·김춘수·신동집·박양균·최광열·김요섭·김종길·김동사·임영창·김진태 등이 있었고, 피란 문인으로는 마해송·최정희·최상덕·양명문·박영준·정비석·최인욱·이상로·구상·최태응·박두진·방귀환·전숙희 등이 활동을 했다.

 

군인으로는 김종문·이영순·장호강·김순기·이용상·김장수 등의 역할이 컸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구라는 교두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문학활동이었다. 당시 대구는 전선문학의 메카였다. 대구의 향촌동은 한국문단의 중심지이자 우리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다.

 

특히 신동집은 '서정의 유형'(55년)으로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유치환과 김춘수가 향토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청마 유치환은 허무와 애련을 절규하는 문학적 기질로, 김춘수는 지적인 형상의 언어로 지역문학권을 주도하며 그 파장을 오늘에까지 남겼다.

 

그러나 지역 문단의 분열이란 오명의 역사를 남긴 시기이기도 하다. 59년 유치환을 중심으로 '경북예술단체연합회’를 결성하자, 이에 대응한 '경북문화단체총연합회'가 백기만을 주축으로 조직된 것. 이같은 대구 문화예술계의 분열은 문학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갈등과 반목이란 고질적인 문학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흔적으로 남아있다.

 

▨  60년대와 그 이후의 대구문학(1960년~ )

 

전쟁의 포연이 멎자 대구도 가치관의 상실과 사회부조리의 후유증을 앓았다. 홍수처럼 밀려온 외래사상이 사회를 휩쓸기도 했다. 이른바 '전후문학'의 등장이었다. 피란 문인들이 떠난 뒤 향토문학계의 주역은 지역 문인들이었다.

 

이규헌의 '포'와 홍성문의 '꽃과 철조망', 이민영의 '잃어버린 체온', 김윤식의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 최선영의 '램프를 끝낼 무렵', 허만하의 '해조' 등이 그 대표작이다.

 

50년대부터 이미 작품을 쓰기 시작한 정석모·박지수·최고·유여론·권성림·전상렬·여영택·이종두·홍성문·윤혜승·서정희·이재철·서석달·이성수·김찬호·윤장근·신현득·최정석·이우출·이만택·김정환·김시헌·김규련·정혜옥·예종숙·권기호·송영목·권오택·김상훈·김원중·금동식·권국명·정재익·조기섭·임도순·김녹촌·김홍곤·김경환 등도 그 주인공들이다.

 

전쟁의 충격과 혼란이 크게 가신 70년대는 향토문단의 자립기반을 세운 기간이다. '참여'와 '순수'의 열띤 논쟁 속에서 지역문단에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의 변화 양상은 주로 신세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젊은 층의 왕성한 진출에 따른 문학 인구의 증가와 작품의 대량생산을 들수 있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세련된 언어구사 등이 나타났다. 윤태혁·정재호·이태수·박곤걸·이하석·이진흥·이기철·이재행·박해수·이옥희·조행자·최석하·이구락·박정남·이동순·김호영·강현국·구석본·남재만·이성복·양치상·송진환·송재학·조두섭·이상규·서종택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시조로는 류상덕·김상형·김종윤 등이, 소설에는 송일호·이수남·윤장근·김광수·김경남·우호성 등이, 수필과 아동문학에는 허정자·김종욱·하청호·백정혜 등이 활약했다. 그렇게 해서 80,90년대에 와서는 문인 수만도 500명을 헤아리는 명실공히 대구문단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200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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