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    업데이트: 12-07-06 14:21

읽을거리

천산대학 본과 4년생
이구락 | 조회 856

blog.chosun.com/kh9hwal 하로동선의 풍류

 

 

 

천산대학 본과 4년생

 

 

구활 (수필가)

 

 

“홍매가 꽃잎을 터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와 대구 경상감영공원으로 달려 나갔다. 선화당 뒤쪽 아직 아동나무인 홍매 몇 그루가 “우리가 아니면 누가 봄소식을 전하겠니”란 꽤 으스대는 몸짓으로 꽃망울에서 하나 둘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꽃잎 가까이 다가서니 싸아한 향내와 함께 환시처럼 홍매가 활짝 핀 대형 화면이 갑자기 피어올랐다.

 

순천 선암사 무우전 옆 5백년 묵은 늙은 홍매가 순간적 연상 작용으로 여백 하나 없는 화면에 무더기로 꽃향기 잔치를 벌이고 있다. 이 환희와 감동! 작년 이맘때쯤 시산제(始山祭)를 지내기 위해 조계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선암사 법당 뒤에 도열하고 있는 홍매를 만난 엷은 흥분이 기억 소자 속에 꼭꼭 박혀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빛의 생성과 회귀가 색깔을 만들어 낸다더니 홍매 다섯 개의 이파리들이 너무 붉어 차라리 아픔이다. 다섯 개의 꽃잎 복판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노오란 꽃술들이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토해내는 야릇한 향은 차라리 슬픔이다. 벌도 나비도 아닌 주제에 그 향기에 끌려 코를 갖다 대보기도 하고 손으로 꽃술을 건드렸다가 손가락에 묻은 화분을 다시 코끝에 문질러 본다. 이곳이 선암사 무우전 옆인지 경상감영공원의 꽃밭 속인지 잠시 멍한 상태로 홍매가 무리지어 있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의식의 유영을 즐기고 있다.

 

홍매의 환영에서 겨우 벗어나니 공원 벤치에는 일터를 잃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군상들 속에 낯설지 않은 얼굴 하나가 아는 체를 한다. 오래 전에 함께 근무했던 직장 동료다. 대낮인데 그의 얼굴은 홍매의 붉은 기운이 옮겨 붙어 역시 붉다. 낮술의 효력이 ‘색깔은 곧 빛의 고통임’을 설명하고 분명 생활이 그를 속이고 있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으려고’ 이 공원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산을 내려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훤칠한 키에 늘 보기 좋았던/ 일흔이 넘어도 늘 정정하시던/ 아버지의 걸음걸이/ 아, 오늘은 완연한 노인의 모습이다/ 어깨가 조금 처지고/ 보폭도 좁아져/ 조심조심 내려가시는 저 뒷모습/ 어찌할거나, 아버지”(이구락의 시)

 

아침에 어깨 축 늘어뜨리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들이 ‘아버지의 뒷모습’이란 시를 떠올리지나 않았을까. 공원에서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옛 동료의 어깨처진 가련한 모습이 어쩌면 할일이 없어 산을 오르는 나의 모습은 아닐런지.

 

나는 지금 천산(千山)대학 본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천산대학은 켐퍼스가 별도로 없고 스승도 없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대학이다. 산이 강의실이며 나무와 바위 그리고 바람과 햇볕이 교수님이다. 강의는 자연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 강의는 주로 바람소리와 물소리, 때로는 사무치도록 적요로운 정적으로 단순하게 진행되지만 학생들의 노트에는 제각각 다르게 적히는 게 특징이다.

 

풍류를 좀 배우려거나 옛 선인들의 기개를 흉내라도 내보려는 생각이 있으면 이 대학의 학생이 되는 것이 지름길에 드는 것이다. 등록금은 물론 없지만 실습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커리큘럼도 별 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천개의 산을 오르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이다. 지난해 초봄 조계산 등반이 천산대학 입학 후 244회 산행이었고, 다시 일년이 지났으니 300회 산행을 코앞에 두고 있다.

 

“마흔 다섯은/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참 대 밭 같이/ 참 대 밭 같이/ 겨울 마늘 낼 풍기며/ 처녀 귀신들이/ 돌아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귀신을 기를 만큼 지긋치는 못해도/ 처녀 귀신 허고/ 상면은 되는 나이.”(서정주의 시 ‘마흔 다섯’)

 

시인은 인생의 절반인 마흔 다섯쯤 되면 ‘처녀 귀신과 상면할 수 있는 나이’라 했다. 그러면 나도 천산대학 본과 8학년 쯤 되어 500회 산행을 마치면 산울림 영감과 함께 낮술 한 잔 거나하게 마시고 산노래를 같이 부를 수 있을까. 천산대학을 졸업하는 날 나도 산울림 영감이 되어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그렇게 영원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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