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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김춘수소전
이구락 | 조회 890

http://blog.chosun.com

2006/08/24

 

[김춘수 소전]

 

내가 본 대구시절의 김춘수 시인

 

이 진 흥 (시인)

 

 

예술가에게는 그가 살았던 곳이 매우 중요한 예술적 토양이 된다. 예컨대 카프카에게 프라하, 모차르트에게 비엔나 그리고 다빈치에게 밀라노가 그러한 것처럼 김춘수에게 대구는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대구는 그가 1961년 경북대학교에 부임하여 81년 영남대학교를 떠날 때까지 그의 40대에서 50대까지, 시인으로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장년기의 20년을 보내며 많은 작품을 쓰고 제자를 길러낸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시에서 관념을 버리고 이른바 무의미시를 실험하여 우리 시단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그것을 독자적으로 정리하며 이론적인 바탕을 정립해 나갔다. 그리고 이 대구시절에 그는 시집[타령조, 기타], [남천], [비에 젖은 달]을 비롯하여 시선집 [처용], [김춘수 시선], [꽃의 소묘]를 출간했고, 시론집인 [시론], [의미와 무의미], [시의 표정] 그리고 수상집 [빛속의 그늘], [오지 않는 저녁],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 등을 출간하였다. 또한 대학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현대문학 연구회를 만들어 <에스프리 동인>을 결성해서 69년과 72년에 동인지 [에스프리]를 발간하기도 했다. 여기 참여한 이들이 권기호, 권국명, 전재수, 이창윤, 양왕룡, 도광의, 윤성도, 이정우, 이하석 등의 시인과 장윤익, 송영목 등의 비평가들었는데, 시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당시 지방도시에서 이들이 결성한 에스프리는 상당히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지금도 대구에서 활동하는 이기철, 이동순, 강현국, 박정남, 이구락 등에서 서정윤 시인에 이르기까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가르쳤던 그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특히 대구에 시인이 많은 이유도 아마 시인 김춘수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마도 그의 생애와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한다면 대구시절을 중심으로 해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 뜻에서 김춘수 시인을 얘기할 때 그의 대구시절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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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눈으로 보는 김춘수 시인의 대구시절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고 시론을 배웠지만 나는 그를 대구시절 초기부터 알지 못하고 대학 졸업 후 뒤늦게 譴堧?같은 느낌으로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대구에서 군복무 중인 197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를 투고했는데 그 때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이 김춘수 시인이었다. 당시 그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차가웠다. 아주 마른 체구에 특히 눈매가 날카로웠는데, 악수할 때의 손은 의외로 부드럽고 따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다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을 때 그는, "종길씨가 심사평을 썼더군요."라고 짧게 말했을 뿐 더 이상 시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내가 그에게 시를 배우고 싶어서 경북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나는 그의 기침소리와 눈빛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학부에서 국문학을 공부하지 않고 독문과에서 철학과로 전전한 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좋게 이해하여 주었다. 논문발표를 할 때 어느 교수가 나의 논문이 문학논문인지 철학논문인지 모르겠다며 비판을 했는데, 그때 지도교수였던 김춘수 시인은 나의 논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었다. 나중에 그가 자리를 옮긴 영남대에 따라가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는 5공화국의 민정당 창당 발기위원으로 영입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그에게 지도를 받겠다고 따라갔는데, 그가 학교를 떠나게 되었으니 나 개인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당돌하게 그에게 히틀러 시대에 베를린 대학 총장을 하며 나찌에 협력했던 하이데거의 예를 들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정치적 격랑기에 사명감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나는 그의 성품으로 보아 현실정치보다는 시인으로서, 교수로서 활동하는 것이 더 그에게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춘수 시인도 내가 자신의 지도를 받기 위해 따라온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미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글쎄.... 뭐랄까, 내가 무슨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권력을 탐내는 사람도 아닌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으니...... 세상에는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 무엇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당시 분위기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치적인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나는 그가 나약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데에서 오히려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원래부터 권력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시인으로서의 도정에서 빗나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권력을 지향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대로 거대한 힘 앞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점은 그가 일찍이 동경유학시절 대단한 신념이나 사상도 없이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 반년이상 囹圄생활을 겪으면서, 말하자면 폭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너무나도 나약한 자신을 똑바로 본 경험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흔히 내세우는 거룩한 이념이나 사상도 고문이라는 폭력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몸소 경험한 것이 일생동안 그를 역사허무주의자로 살게 한 것이었다. 그는 폭력을 대단히 혐오했지만 용감하게 그것에 맞서서 싸우지 못하고, 뒤에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기만 했던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김춘수 시인과 관련해서 나는 한 친구로부터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내 친구가 어느 날 대구 중앙통에 있는 한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 가지고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잠시 입구에 서 있었다. 그 때 오십대의 신사 한 분이 비를 피해서 서점으로 들어왔는데 바로 김춘수 시인이었다. 내 친구는 그를 알고 있지만, 그는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김춘수 시인은 매우 흥분해서 "아니 저런...!" 하면서 밖을 가리키더라는 것이었다. 그쪽을 보니 불량배로 보이는 한 남자가 연약한 여성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이었다. 김춘수 시인은 계속해서 "저런, 저런...!" 하며 분노로 몸을 떨면서 안타까워하더라는 것이었다. 당장 쫓아가서 그 불량배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야단을 치고 싶으면서도 그 무지막지한 불량배에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어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분노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맞서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춤으로 융화한 처용설화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연작시 처용단장을 쓰게 된 매우 절실한 내적 연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런 얘기도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김춘수 시인이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대학의 총장이 비서와 함께 뒷문으로 들어와서 잠깐 참관(?)한 일이 있었다.(그 총장은 가끔 그렇게 강의실 순회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열강을 하던 그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변하더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총장일행을 쏘아보면서 비서에게 "나가시오, 강의 중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당장 나가시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자 학생들도 뒤를 돌아다보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눈치를 챈 총장 일행이 황급히 어색한 인사를 하고 나갔는데, 다음 순간 그는 탁자 위에 출석부를 팽개치듯 놓고는 강의를 중단한 채 나가버렸다는 것이었다. 내성적이면서 얌전한 교수로서 그는 자유를 억압하는 힘에 정면으로 맞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날 그가 보여준 행동은 한동안 대학 내에서 신선한 사건(?)처럼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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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김춘수 시인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고 표정이 차가워 보였던 것도 그가 어떤 의미의 긴장을 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던 듯 싶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가끔 <-해라>보다 <-하시오>라는 어미를 붙여 약간의 거리감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느낌을 주었다. 그러한 태도는 만년까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러한 <거리 두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는 말년에 시에서도 놀라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어찌 생각하면 대구시절 한 때 그가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던 것도 그러한 성품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는 대구의 시인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는데 뒤를 돌아다보니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고 숨이 답답하고 현기증이 나서 꼼짝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그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만촌동 자택의 장독대에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고소공포증이라는 일종의 신경성질환(노이로제)의 원인이 단순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김춘수 시인의 경우 매사에 어떤 심리적인 긴장감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만일 매사에 낙천적이고, 성격이 무디었다면 그런 신경증상에 시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체질화된 긴장감은 만년까지 작품에 대한 집중력을 가능하게 하고 그의 작품이 끝까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늘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서였을까? 나는 그의 술에 취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구시절 그는 늘 깨끗하고 깔끔했다. 탈모증 때문이었는지 늘 캡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세련된 멋쟁이처럼 보였다. 그는 국문과의 교수였지만 소월이나 영랑보다 발레리나 엘리어트를 자주 인용했고, 뒤생이나 잭슨 폴록을 즐겨 화제로 삼아 서구 취향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내가 독문과를 나온 것을 의식해서인지 릴케에 관한 얘길 자주 했다. 한 번은 나에게 "내가 지금 독일어를 배우면 릴케의 시를 독일어로 읽을 수 있을까요?"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실제로 독일어 공부를 해서 릴케를 읽겠다기보다는 그만큼 릴케의 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원어가 주는 시적 울림을 느껴보고 싶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릴케의 초기 시는 감미롭고 여성적이지만, 릴케의 본령이 나타나는 후기 시에는 극단적인 내면의 고독과 당시 유럽의 정신적 불안, 그리고 인간의 실존의식이 무섭도록 잘 드러나고 있다는 얘길 하곤 했다. 당시 대구 동성로에는 세르팡이라는 찻집이 있었는데, 거기 젊고 아름다운 마담이 김춘수 시인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선생은 그 찻집의 단골이었다. 작지만 깨끗하고 세련된 분위기여서 김춘수 시인을 따르는 문학청년들이 자주 갔던 곳인데 그 찻집의 이름을 그가 지었다는 것이었다. 세르팡(serpent)이라면 방울뱀을 닮은 서양 악기 혹은 프랑스 상징주의와 30년대 9인회 멤버들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예쁜 찻집 이름으로 따 온 것은 바로 김춘수 시인의 깔끔하고 세련된 서구 취향적인 정서와 미의식의 일단을 드러낸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김춘수 시인은 쓸모 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자주 말했다. 예술은 그 자체로서의 존재의미를 가지는 것이므로 현실의 이용대상으로 삼으면 그것의 순수한 가치가 상실된다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시적 라이벌로 생각했던 김수영 시인과의 극명한 차이가 바로 그러한 태도였다. 시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어떤 이념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소위 그의 순수시는 바로 무용성의 미학에서 출발된 것이었고, 그것을 밀고 나간 것이 무의미시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70년대 만촌동의 자택 마당에는 남천이 몇 그루 있었다. 그는 우람하거나 튼튼한 느티나무보다는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南天같은 나무에 끌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만촌동 자택의 서재를 南天齋라고 부르고 그 때 쓴 시를 묶어 [南天]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표제시는 무의미시의 한 전형이다. <남천과 남천 사이 여름이 와서/ 붕어가 알을 깐다./ 남천은 막 지고/ 내년 봄까지/ 눈이 아마 두 번은 내릴 거야 내릴 거야.> 그는 이 짧은 시를 통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시인은 다만 뜰에 서있는 나무 南天(이것은 동시에 남쪽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이미지의 중첩효과도 나타난다.)을 바라보면서 연상되는 자유로운 이미지와 리듬을 통하여 극단적인 자유를 꿈꾸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유용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바로 무용성의 미학이었다. (*)

 

(현대시학, 2005-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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