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    업데이트: 15-01-06 06:32

칼럼

어느 문학소녀에게
이구락 | 조회 792

 

어느 문학소녀에게

 

李 九 洛<시인>

 

작품이 잘 되지 않는 요즘 나는 늘 우울하게 지냅니다. 어제는 한 선배시인이 요즘 시가 잘 쓰여져 기분이 좋다며, 어린애처럼 들떠 술을 사더군요. 그렇지요. 시인에게는 마음에 드는 시를 쓴 날이 가장 즐거운 날이니까요. 반면에, 끙끙대며 찢어놓은 破紙만 수북히 쌓이는 날은 우울한 날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시를 잊고 지내는 날들입니다. 이 경우가 시인에게는 가장 두려운 상태입니다. 자기 귀를 자른 고흐의 자학도 화가로서 느낀, 바로 이런 참담함의 결과가 아닐까 싶군요. 결국, 늘 시를 생각하고, 늘 사물에게 나직이 「너는 누구냐?」고 되물어보는 생활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것이지요.

 

오늘 그대의 편지를 반갑게 받아보았습니다. 행간에 어른거리는 그대 마음 언제나 눈부십니다. 생활 속에서 그토록 자주 일어나는 감동과 밝고 자잘한 웃음과 속수무책의 눈물들, 그대 편지는 늘 내 마음 속 빈 꽃병에 살며시 내려와 꽂히는 꽃이 되어 잊어버린 내 추억의 둘레까지 환하게 밝힙니다.

 

모처럼 동봉한 시 역시 그대 마음처럼 맑고 깨끗하군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좋은 시라 하기 어렵겠지요. 여학생시절에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은, 너무 감상적인 감성시대라는 말에 다름 아니지요. 문학에 뜻을 둔다는 것은 즐거움보다 참기 어려운 고뇌를 일생의 숙제로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성공한, 참된 시인이란 재능과 끈기가 어울려 꽃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至難한 과정을 통과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시쁘기를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러한 통과의례의 고단한 여정에서 쓰러지지 않는 일이며, 아니 수없이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나아가는 일이며, 이것은 철저히 개인의 몫입니다. 특히, 이 땅의 여류들 중에는 결혼과 동시에 문학을 포기하거나 감수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도 귀띔해 두고 싶군요.

 

지금 보고 있다는 詩論보다는 신문이나 잡지가 더 유익할지도 모르겠군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더듬이에 와 닿는 모든 사물을 통하여 감수성과 상상력을 길러 나가기 바랍니다. 인간은 낮에는 가까운 것밖에 볼 수 없지만, 밤에는 멀리 떨어진 하늘의 별도 볼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지요. 밤의 눈을 가진 이만이 진정한 예술가라는 생각을 권하며 이만 줄입니다.

좋은 시 많이 읽고, 늘 맑게 깨어있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 매일신문/칼럼(매일춘추) ․ (1990.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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