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8    업데이트: 15-01-06 06:32

칼럼

건망증의 미학
이구락 | 조회 762

 

건망증의 美學

 

李 九 洛 <시인>

 

건망증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아름답다. 만약 인간에게 이 탁월한 능력(?)이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삭막해졌을 것 같다. 건망증이 없다면 인간은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긴장이 연속되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무너지는 마음을 지탱시키는 것이 바로 건망증이다. 인간의 두뇌는, 용량이 꽉 차기 전에 자율적으로 적절히 비워내는 조절역량이 있어, 마치 컴퓨터의 디스켓 같이 다음 정보를 입력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 조절역량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건망증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건망증은 위대한 인간의 특성이며, 정신건강을 유지시키는 절묘한 묘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무리 비통하고 절박한 일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고통은 점점 묽어지게 마련이다. 흔히 말하듯이 세월이 약인 것이다.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 건망증이다.

 

일상생활 중에 건망증 때문에 낭패를 당한 경험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부조금을 넣고 갔다가 잔치음식까지 먹고는 그냥 돌아와서 옷 벗을 때에야 발견했다느니, 가게에 물건을 사러가서 무슨 물건인지를 잊어버리고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그냥 나온 얘기 등은 주위를 유쾌하게 만든다. 한 대학교수가 점심을 먹으러 캠퍼스를 가로질러 식당으로 가다가 마주친 학생의 질문을 받았다. 한참 설명하고 나서, 학생에게 "내가 지금 어느 쪽으로 가던 길이냐?"라고 했다. 또, 한 고등학교 담임교사가 옆 반에 조회하러 들어가 저금도 거두고 명렬 정리까지 하고 나니 그 반 담임이 조회를 하러 들어왔다.

 

자, 이쯤 되면 중증의 건망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젊은이보다는 중견 이후에 이 건망증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고, 두뇌의 기억력과 함께 집중력도 떨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 중에는 뛰어난 기억력을 오래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쉬 피곤함을 느낀다. 깔끔하고 성실하나 매사에 너무 빈틈이 없고, 또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교과서로 읽은 이하윤 시인의 수필 「메모광」이 생각난다. 언제 나타나 사람을 당황하게 할지 모르는 이 건망증을 위해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두면 좋겠다. 필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만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매일신문/칼럼(매일춘추) ․ (1990.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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