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    업데이트: 12-06-26 15:16

신작시(발표작)

길 위의 시간
이구락 | 조회 854

 

길 위의 시간

 

 

 

이구락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 제4장을 일부러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4년 복역을 마친 살인범 죠오드는 불쌍한 자라를 안고 한때 목사였던 짐 케이시를 만나 함께 언덕을 세 개 넘어 집으로 간다 4년만의 귀향이다 “도대체 뭣 땜에 사람들을, 어디로 끌고 가고 싶어하는 거죠, 아저씨? 그저 끌고만 가면 되는 걸 가지고.” 4년의 감옥이 청년을 철들게 했다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연필을 상대로 하여 쓸 가치가 없다.”고 늘 말하던 아버지 죠오드의 아들답지 않게 철이 든 아들 톰 죠오드의 서걱거리는 대화를 따라가는 동안, 태평양은 조용히 비행기를 통과시키고 있었다 비행도 인생도 이렇듯 많은 생각 속에서도, 생각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KE015 기 11시간 20분 만에 로스엔젤리스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을 동안, 화장실에 세 번 다녀오고 「블루 발렌타인」의 여주인공과 인생의 공허함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기도 하고, 삶의 일탈이 때로는 고단한 숙명일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그저 그때마다 열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수긍하기도 하면서, 모하비 사막의 덤블링 트리처럼 굴러가다 아무데나 깊이 뿌리 내리는 시간, 태평양 건너가는 동안에

 

 

이구락/ 197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서쪽 마을의 불빛』 『그 해 가을』 『와선』 등. 현재 대륜고등학교 교사.

 

 

 

[불교문예 57호 -201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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