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    업데이트: 15-02-23 13:12

그 해 가을

억새는 무리 지어 옷을 벗고
이구락 | 조회 2,077
억새는 무리 지어 옷을 벗고

이구락

늦가을엔 하루쯤 짬을 내어
영남알프스로 달려가
억새능선에 서 보아야 하리
간월산 구름 머뭇머뭇 다가오고
영취산 바람 데굴데굴 굴러오는
신불산 드넓은 억새 평원,
쯤에서 걸음 멈추고
오래오래 귀 기울이며 앉아 있어야 하리
무리 진 억새는 역광의 가을햇살 아래
키 작은 은빛 알몸
눈부시게 흔들고 있으리
-싫어요, 안 되요, 그러지 말아요!
흔들고 흔들리며 억새는 온몸으로 부르짖으리
머리채 흔들며 몸부림치는,
잠깐씩 어깨 들먹이며 흐느끼는
아, 억새는 한순간 숨막히는 관능이 되리
늦가을 여문 햇살과 바람, 오래도록
알몸의 억새와 살 섞는
저 눈부신 혼례 앞에서,
멀리 천황산 바라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 붉히리
그때쯤이면 소리와 움직임 모두 사라지고
아, 눈부신 슬픔 하나 껴안을 수 있으리
늦가을엔 하루쯤 짬을 내어
영남알프스로 달려가
억새능선에 서 보아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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