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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23) 2015년 11월(360호)
아트코리아 | 조회 632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23

 

서화 작품으로 대구를 대구답게 한 사람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

 

  지난 2년간 이 지면을 이어가면서 ‘서병오의 그림자’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예술적 파토스가 드리운 그늘이 넓었고, 그의 작품이 보여준 예술성이 근현대기 대구의 서예가, 문인화가들에게 커다란 동력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1960년대 초 소헌 김만호가 아직 한의사로서만 알려졌을 때 그와 서동균이 나눈 대화도 서병오에 대해서였다. 예술작품은 작가가 지닌 전 인격의 현현이라 작가를 빼놓고 작품을 말하기 어렵지만, 특히 서예와 문인화는 조금도 다르지 않아 작품이 바로 그 사람이다. 붓이 지면에 닿는 찰나가 완성의 순간이될 수밖에 없는 매체인지라 다듬거나 가릴 틈이 도무지 없어 그 사람의 본성과 바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먹과 붓과 종이의 순간성은 의도나 꾸밈이들어갈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하였다.

 

 

  ‘무량수(無量壽)’ 세 글자는 강인한 에너지가 충분하고, 중심이 튼튼하면서도 호기롭다. 그는 문 자와 붓과 화면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획의 조형은 그의 신체가 만들어낸 운필에 따라 침착하고 통쾌하게 펼쳐졌다. 서병오라는 유일무이한 개성이 어느 한 순간 검은 먹을 붓에 찍어 자신의 전  존재를 이 화면에 투사하였다. 서병오의 서예, 사군자에 나타난 강한 힘과 진한 정감은 비교할대상이 드물 정도로 압도적이다. 정감이 무르녹아 있는 풍후한 농묵의 선질(線質)이 갖는 표현력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서병오만의 필성(筆性)이다. 그것은 여과된 깊이를 느끼게 하거나 세련된 구조를 갖춘 글씨와는 다른 심미성이며 서예의 또 다른 미적 세계이다.

 

  ‘무량수’는 소멸이 예정된 유한한 인생을 좀 더 오래 누리기를 기원하는 축수(祝壽)의 말로 읽히지만, 셀 수 없는 수명의 시간(Amitayus)과 셀 수 없는 빛의 공간(Amitabha), 곧 무궁무진의 시공(時空)으로 풀이되는 아미타불의 명호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해도 극락으로 이끌어 주시는 부처님이 아미타불이다. 서병오는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였지만 불교를 좋아하였다. 율곡 이이가 선조의 명으로 ‘김시습전’을 지으며 그 생애를,마음은 유자(儒者)이나 행적이 불교였다는 ‘심유적불(心儒跡佛)’의 모순적인 네 글자로 요약하였지만,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불교적 사색을 병행한 유교 지식인도 많았다. 누구의 세상인들 난세가 아닐 수 있을까? 팔공산 관암사에도 서병오의 ‘무량수’ 편액이 있다.

 

  서병오는 환경, 경봉 등 선사들과 교유하며 사찰을 자주 찾았고 동화사, 은해사, 통도사, 용문사, 선석사 등 여러 사찰에 편액과 주련을 남겼다. 그가 호불(好佛)하였던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과거 공부를 하며 사찰에 기거하였던 것이 직접적 이유가 될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산사에서 목탁소리, 예불소리 듣고, 향 냄새 맡으며 스님들과 살았던 경험이 세간에 살면서도 탈세간 불가의 공간을 찾고, 스님들과의 교유를 달가워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불교는 유교보다 그의 인생관, 세계관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서병오는 총명을 타고난 천재였고, 부유한 집안이라 훌륭한 스승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당대 명사의 지우를 받는 행운을 누렸고, 한중일을 두루 여행한 넓은 견문을 가졌다. 서병오는 대구 출신으로는 최초의 국제적 지식인일 것이다. 그러나 시서화 삼절을 넘어 팔능(八能)이라고 했던 다재다예(多才多藝)한 천재적 자질과 유족한 환경 속에서 그는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고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더 넓은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에게 인생은 예술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서병오는 만년에 서예의 한길을 가지 못한 것을 자탄(自嘆)하였다. 그러나 호기로운 인생을 살았기에, 분방한 삶의 궤적이 있었기에, 그의 인생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기에, 천연한 직정(直情)의 거침없는 작품이 있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는 예술의 속성이다.

 

  지난해 서병오로부터 이 연재를 시작하였지만 주제가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와 문(文)의 문화’라는 넓은 범주였기에 서병오의 ‘소남서소(小南書巢)’를 모티프로 하여 소남 이일우와 그 집안의 우현서루를 통해 국망의 시기에 대구의 유지들이 보여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을 이야기하였다. 서병오의 작품을 비롯해 대구의 서화 명작을 많이 알리지 못해 아쉽다. 다시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를 돌아 볼 때, 대구는 서병오를 낳았고, 대구사람 서병오는 서예, 문인화 작품으로 대구를 대구답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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