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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22 - 문필(文)·교육(敎)·서예(書)의 도시 대구_ 이인숙 2015년 10월(359호)
아트코리아 | 조회 597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22

 

 

문필(文)·교육(敎)·서예(書)의 도시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문(文)의 도시 대구의 연원은 1721년 경상감사로 부임한 조태억이 설치한 낙육재(樂育齋)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낙육재는 경상감영에서 운영한 우리나라 최초의 도 단위 공립 고등인재양성기관이다. 향교나 서원, 군현의 양사재(養士齋) 등과 달리 경상도 전역에서 재생(齋生) 후보를 추천받아 시험을 거쳐 선발했고, 합숙시키며 교육하였다. 1807년에는 전용 도서관인 장서각이 건립되었다. 낙육재는 재정이 풍부하여 도내의 유생들은 뽑히기를 선망하였고, 대구 낙육재 출신은 성균관에서도 인정받았던 권위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감영에서 멀지않은 남산동 문우관 부근에 있던 낙육재가 조선의 전통교육 시스템을 말살한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되자 대구 유림은 낙육재 학전(學田)으로 협성학교를 당시 교동에 있던 대구향교 내에 설립하였다. 협성학교는 1916년 대구고보(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로 재편되었고, 경북중고등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낙육재 장서각의 도서는 일부가 남아 대구시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 수장되어 있다. 대구는 일제 강점기에도 대구사범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등 남선(南鮮) 유일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던 교육도시였다.
 

  대구는 185년 간 지속된 영학(營學)의 전통이 있었고, 근현대기에도 고등교육기관이 집중된 도시여서 유난히 교직자, 학자 서예가 층이 두터웠다. 경북중학교 교장, 해동서화협회 회장을 지낸 학연(學淵) 문기석(1903~1976),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5년간 교직에 있었던 삼우당(三友堂) 김종석(1904~1973), 성균관대 전신인 명륜학원 출신으로 대구향교에 홍도학원을 창립한 한학자 소원(韶園) 이수락(1913~2003), 일찍이 한글을 썼던 왕철(旺哲) 이동규(1918~2002), 고시조를 연구한 국문학자 모산(慕山) 심재완(1918~2011), 도쿄에 유학한 미술교사였던 취산(翠山) 박수석(1918~1995), 영남서화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송재(松齋) 도리석(1919~2002), 경북서예가협회 회장을 지낸 중문학자 수촌(壽邨) 서경보(1921~2004), 봉강연서회, 대구묵연회 회장을 지낸 소금(小錦) 우상홍(1923~?), ‘팔공산 관암사 창건비’와 ‘석재 서병오선생 예술비’(1983) 제자(題字)를 쓴 석대(石帶) 송석희(1926~2013), 동화사 ‘비로암 편액’과 ‘죽농 서동균선생 예술비’(1983) 제자를 쓴 동애(東涯) 소효영(1926~2005), 대구 사군자화의 맥을 계승한 천석(千石) 박근술(1937~1993) 등은 한 시대에 한 자리를 차지했던 명가들로 학교가 직장이었던 서화인들이다. 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라 유필(儒筆)의 전통을 이은 교직자, 학자 서예가가 사업가, 정치가, 의사 서예가 보다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하였다.

 

  소헌미술관에 소헌(素軒) 김만호(1908~1992)와 송석희, 박근술, 황기식, 문기식, 해암(海巖) 이정식, 김대식, 김종석, 유재(腴齋) 오광진 등 당대 명가들이 합작한 ‘9인 합작 서예’가 있다. 서예는 앉은 자리(즉석)에서 완성될 수 있지만 한 폭에 이렇게 글씨만으로 여럿이 합작한 예는 흔치 않다. 송석희는 “붓으로서 힘을 기른다(以筆養力)”고 서두를 열었고, 모두 붓을 잇달아 들어 일필휘지 하는 가운데 문기석은 “세상에 살면서도 오염되지 않는다(處世無染)”고 하였다. 김만호는 “서예를 즐기는 맑은 맛은 연못에 고기를 기르는 것보다 낫다(書味淸於水養魚)”라고 맺었다. 형세로 보아 모두 취필(醉筆)인 듯하다. 이렇게 함께 즐기면서 가꾸어 온 것이 대구의 서예 문화이다.

 

  심재완의 ‘오정소정시문집(梧庭小庭詩文集)’은 서병오, 서동균, 허섭 등 지역 작가를 후원한 오정 이종면과 소정 이근상 부자의 컬렉션이 기증될 때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감사의 뜻으로 발간한 문집의 제목 글씨이다. 요즈음 ‘캘리’로 부르는 ‘멋글씨’로 책 제목을 많이 쓰듯, 예전에는 당대 명필의 글씨를 많이들 받았다. 심재완은 날아갈 듯 붓끝이 살아있는 운치 있는 필치로 책 제목도 많이 썼다. 당대 명필을 필요로 하는 용처 중 목조건축물의 편액이나 주련이 있다. 소효영은 서병오, 서동균의 서맥을 계승하여 반듯하면서 힘이 있는 중후한 대구풍 행서를 많이 썼다. 동화사 ‘비로암 편액’은 그 한 예이다. 


  대구는 문필(文)의 도시이고, 교육(敎)의 도시이며, 서예(書)의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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