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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 ⑱ - 문무겸전의 예술가 청남(晴南) 이상정(1897~1947)_ 이인숙 2015년 6월(355호)
아트코리아 | 조회 680

문무겸전의 예술가 청남(晴南) 이상정(1897~1947)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이상정은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와 미술을 공부하였고 귀국 후 계성, 신명, 경신, 오산 등 여러 학교에서 역사, 지리, 수학, 한문, 습자(習字), 도화(圖畵) 등을 형편에 따라 가르쳤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와 망국의 현실을 감내할 수 없었던 그는 어머니와 형제, 부인과 친구가 있는 대구를 뒤로하고 1925년 경 하얼빈으로 망명하여 1947년 귀국할 때 까지 중국 땅을 표박(漂迫)하며 항일전선에 참여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군대를 양성하고, 병력을 통솔하며, 전투를 지휘한 무장 투쟁가 이상정 장군은 무인(武人)이지만 무인의 일면만 가진이가 아니었다. 그는 한편 예술가였다. 서화를 애장하고, 글씨와 전각에 전심한 서화가이며, 시와 기행문을 비롯한 산문을 남긴문인(文人)이었다.

 


  이상정의 문인적 소양은 조부 금남(錦南)과 백부 소남(小南)의부(義富)의 명예를 실천하여 사재로 운영했던 우현서루와 강의원의 한학 교육을 통해 어릴 적부터 착실히 배양된 것이었다. 그의 호는 백부와 요절한 아버지 우남(又南)이 조부의 호에서 남(南) 자를 땄듯 ‘남’ 자 돌림의 청남(晴南)이다. 이상정은 대구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최초의 대구 출신 서양화가였으며,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고, 최초로 ‘미술연구’ 그룹을 조직했다. 대구 사람으로는 최초의 전문적인 전각가였으며, 아마도 대구의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미술교사였을 것이다. 이상정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미술을 받아들였다가 언젠가부터 한학 지식인으로서 익숙했던 서화로 다시 회귀하였다고 생각한다. 선구적 서양화가에서 전통 미술로 전향한 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에게서도 볼 수 있는 양화도입기의 한 현상이기도 하다.

 


  1936년 이상정의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풍문에 동생 상화는 남경으로 갔으나, 무사함을 알게 되자 10여년 만에 만난 형제는 육조시대의 사찰과 유적지를 함께 돌아보았다. 귀국할 때 가져온 이상정의 원고를 이상화는 일경의 감시를 받던 자신이 보관하지 않고 친구 김봉기에게 맡겼다. 살아남은 원고는 광복 후 백기만에 의해 『이상정 장군 유고 중국유기(李相定將軍遺稿中國遊記)』(1950)로 출판되었다. 지금 국내에 있는 이상정의 전각 작품집 『청금산방인원(聽琴山房印苑)』도 이상화가 이때 함께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청금산방인원』은 이상정이 새긴 인장 239방의 인영(印影)을 찍은 인보집이다. 수준 높은 작품이 가득한 것은 그의 서예 실력과 전각에 대한 견식을 반증한다. 전각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많은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며, 이 정도의 각을 할 수 있으려면 당시 중국 전각가들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당시 전각이 크게 유행이어서 1895년 경 상해에 천심죽재(千尋竹齋)를 마련해 정착했던 민영익은 오창석을 졸라 자신을 위한 인장을 무려 300여 방이나 새겨 받았던 애인가(愛印家)였다. 민영익은 중국에서 발견한 복건성 야생란인 건란을 사생하여 얻은 ‘운미란’의 난법으로 노근란을 그려 뚜렷한 공감과 예술성을 획득하였다. 노근란은 뿌리 내릴 땅을 잃은 묵란으로 조국을 잃은 유민(遺民)의 심정을 우의한 도상이다. 일찍이 문인의 소양을 갖추었던 이상정에게 전각은 남선북마로 떠돌던 이국땅에서 공간적, 재료적 제한에 구애됨 없이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펼치기 적합하였을 것이다. 이상정의 이 인보는 망명 투쟁의 고난 속에서 중국이라는 환경과 그의 예술적 재질이 만난 희귀한 열매이다. 『청금산방인원』은 한국 전각사의 소중한 작품이며, 운미란과 함께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중국 땅에서 이룬 높은 예술적 성취이다.

 

  이상정은 상화가 돌아갈 때 소장하고 있던 민영익 난그림도 함께 보냈다. ‘이상정제 민영익 석란(李相定題閔泳翊石蘭)’이 그것이다. 이상정이 이 그림에 제발을 써넣은 때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으로 귀국한 1947년 9월 9일이다. 그는 차분히 이 그림에 얽힌 민영익의 제작 습관을 기술하고 동생 상화가 남경으로 왔던 사연과, 상화는 이미 죽고 없는데 상자를 열어 여전한 이 그림을 보는 ‘현연(泫然)’한 심경을 기록하였다. 제발을 써넣은 얼마 뒤인 10월 27일 이상정은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이상정은 다감한 심성과 예술적 감성을 지닌 문인이자 일제의 식민 지배에 무력으로 투쟁한 무인이었다. 이상정은 문무를 겸전한 근대기 대구인이며, 맑고 드높은 정신을 지닌 예술가이다. 그의 인물됨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사실 확인 작업은 한참 미비하다. 그의 정신과 행적, 작품에 대한 이해 또한 턱없이 미진하다.

 

 

 

※ 5월호 본문에 표기된 “변종하는 변성규의 손자”는 “변종하는 변성규의 아들”로 정정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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