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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

대구의 근현대기 서화(書畵)와 문(文)의 문화⑮ 2015년 3월(352호)
아트코리아 | 조회 443

근대기 대구 미술의 시작


명필 팔하(八下) 서석지(1826~1906)

 


  지역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미술 작가가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것은 18세기 말이 되어서이다. 의식주와 관련되는 민예미의 범주 외에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예술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지역사회의 문화 의식과 경제력이 넓어진 것이 이 무렵이다. 미술이라는 형이상학적 물질의 세계는 생존과 생활의 단계 이상이 되더라도 정신의 폭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또한 감상 미술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일지라도 ‘작가’가 출현하기 쉽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역 작가가 처음 나타난 미술 분야는 서예이다. 가장 수요가 많고 가장 가치 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평양의 눌인(訥人) 조광진(1772~1840), 전주의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은 서울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못지않은 명성을 지역에서 누렸다. 그런데 대구는 명필의 출현이 늦었다. 감영이 있는 행정 도시여서 식자층과 붓글씨를 잘 쓰는 관료, 학자들이 많아 글씨의 공급층이 넉넉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적 덕목과 나란하기 어려운 예술 본래의 탈규범적인 면이나 보편 교양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예술만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인정되기 어려웠던 보수적 정서가 더 큰 이유였을 수도 있다.


  지금 널리 알려진 서석지의 필적은 수태골 암벽의 <거연천석(居然泉石)>이다. 만년에 팔공산 아래로 이사하여 팔하(八下)로 자호했던 자연회귀의 심경을 주희(朱熹)의 시구를 빌어 자신의 이름과 함께 팔공산에 새겼다. 공력을 깊이 쌓은 단아한 해서로 위나라 종요의 소해(小楷)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 서풍이다. 이삼만도 이러한 해서를 많이 썼다. 서석지는 11살 때 이삼만에게 배웠고, 평생 글씨에 전력하며 서예론까지 남긴 당시 대구에서 전례가 없던 전문 서예가였다. 스스로 “글씨를 쓰면서 늙은 40여 년 동안 서울을 왕래하면서 널리 고금 서가의 필적을 구하여 공부하였다.”고 했다.

 


  당대에 서석지를 유명하게 한 것은 경상도 관찰사로 왔던 해장(海藏) 신석우(1805~1865)가 1856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쓰게 한 <이봉이록(爾俸爾祿) 민고민지(民膏民脂) 하민이학(下民易虐) 상천난기(上天難欺)> 16자 편액이었을 것이다. “너의 봉급, 너의 벼슬은 백성의 살, 백성의 기름이다. 너의 휘하 백성은 학대하기 쉬울지라도, 너의 위에 있는 하늘은 속이기 어렵다”는 뜻으로 송태종이 관리들에게 좌우명으로 삼게 한 문구이다. 3칸 길이에 달했던 이 편액은 경상감영 징청각이 경상북도 농무과로 쓰이던 1931년에도 걸려있었다고 한다.

 


  서석지는 지역의 여러 유력 문중에 필적을 남겼는데 지산동 학산재, 화원 인흥마을 광거당, 만촌동 모명재 등에 현판이 있고, 소남 이일우의 부친 금남 이동진과도 교유하였다. 1906년 78세 때 쓴 <시전미가(市廛未暇)>대련은 점과 획의 강약과 대소 변화가 어울린 가운데 강건하면서도 유창한 서석지 만년의 서예 세계를 보여준다.

 


  ‘필감(筆鑑)’은 고전 서론(書論)에 자신의 창작 경험을 응집한 서예 이론서이자 비평서로 그가 집안에 남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과 함께 아들 중산(中山) 서경순(1850~?)에 의해 1917년 대구 재전당서포에서 『필감부초천자(筆鑑附草千字)』로 출판되었다. 서경순은 남산동 문우관의 ‘진덕문(進德門)’을 썼고, 1914년 문우관 강회에 참여하여 지은 시도 남아 있어 부친의 필법과 문장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석지는 서병오가 동화사에서 공부할 때 글씨를 감평(鑑評)해 주었다고 하며, 서동균이 어려서부터 글씨를 배운 조부 창파(蒼波) 서용묵과 시문서화로 교유하였으므로 근대기 대구 서화계와 직접 연관된다. 1900년대 초반 서병오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대구의 서예, 문인화는 1920년대 말 이후 수채화, 서양화로 중심 동력이 옮겨간다. 서석지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미술 분야 작가로는 지역 최초의 인물이다. 서석지의 서예는 근대기 대구 미술 형성의 계발적 토대가 되었다. 

 


글|이인숙 한국학 박사, 대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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